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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임금들의 패턴(4)
게시물ID : humorbest_3925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24
조회수 : 4928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10/02 20:59:00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9/30 21: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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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영정은 관련자료나 음모설이 마구 난무하는 바람에 정체를 겪었습니다.
숙영정에 대한 정리도 1차적으로는 끝났고, 
이번 학기 수업으로 듣는 인권변론사에 집중하려면 일단 조선왕조 쪽부터 빨리 정리할까 싶어
우선 효종~숙종에 대해 예전에 썼던 메모를 업뎃합니다.
경종 영조 정조에 대해서도 메모를 글로 풀어 쓴 다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조가 끝난 후 순헌철 고종까지 서둘러 끝낸 다음 인권변론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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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효종 : 왕자 시절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세계사 격변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삼전도 굴욕 이후 10여년간 심양에 잡혀가 있었고 북경 함락 시에도 종군했던 것. 이 경험이 효종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친청을 표방하고 상업과 서양문물에 깊은 관심을 표했으나, 고대하던 귀국 후 불과 3개월 만에 사망합니다. 반면 봉림대군은 아버지 인조 앞에서 반청컨셉을 잡은 흔적이 보이고 인조가 이를 기특하게 여긴 것같네요.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이 되는 것이 원칙인데도 인조의 강력한 의지로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었고,
반면 소현세자 일가는 인조와 김자점의 주도 아래 처참하게 몰락하죠. 
(원칙에서 다소 벗어난 이 왕위 승계는 현종 대에 예송논쟁의 원인이 됩니다)

효종은 자신을 둘러싼 거대세력, 청나라-인조-산당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을 해나갑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순응하면서 크게 무리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는 전략을 펼치죠.

"효종의 북벌"로 유명한 북벌은 왕권강화의 수단. 애초에 임금도 사대부도 북벌 자체를 진정성 있게 준비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송시열의 저술에만 내용이 등장하는 기해독대 북벌논의는 실제로 있었던 대화라고 보는 편이 송시열의 명성과 학문적지위에 비추어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북벌을 진심으로 준비했다고는 생각 안 함. 기껏해야 호란이 다시 벌어지면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였을 거라고 봅니다.
즉, 진심으로 한 판 붙을 요량으로 북벌준비를 했다기 보단 가상의 정치구호로 내건 것이 바로 북벌.
반면 숙종대의 윤휴는 진심으로 북벌을 주장한 것 같음.

18. 현종 : 아버지 효종과 마찬가지로 산당 중심의 정치지형을 그대로 물려 받았습니다.
1차 예송논쟁은 원칙대로라면 3년상을 해야할 것이 이미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관례가 굳어져 있었고, 국제에도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과의 충돌 없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갈등의 단초가 은폐된 채 넘어가는거죠. 송시열은 이때에도 체이부정을 이유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었지만 대신들은 이 문제의 발언을 되도록 묻으려 했습니다.
2차예송논쟁은 남인이 승리한 듯하지만 여전히 조정에서의 산당의 세력은 막강합니다.
남인이 얼핏 여당인 듯하지만 여소야대랄까..산당을 견제하기에도 버거울 정도의 여당이었습니다.
사실 현종은 제2차 예송으로 서인의 약점을 잡자마자 그 해 병으로 죽습니다. 
2차예송의 파급력은 현종 당대보다는 숙종즉위 직후 발휘되죠.

현종의 통치술은, 효종의 정통성이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산당을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겁주면서 산당(정확하게는 송시열)의 지지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명종 + 순헌철류의 꼭두각시를 제하자면 성종 효종 현종 정도가 신권에 가장 많이 시달린 임금으로 보여집니다.

19. 숙종 : 제왕으로서의 자의식이 매우 강한 편이라 왕권에 대한 도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현종이 잡아놓은 서인의 약점(2차예송논쟁)을 이용해 17세 어린 나이에 서인세력을 몰아 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산당세력에게 수십년간 쩔쩔 맨 것과는 대조되는 점.

왕권에 대한 일체의 도전도 불허하는 기본방침이 20대 시절의 불같은 사랑과 결합한 것이 바로 희대의 스캔들 장희빈 사건.

3대 환국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집권 초반에는 외척 김석주의 보디가드를 받으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김석주는 숙종의 전폭적인 신임 하에 집권초반10년의 정치전략을 만들어 바쳤습니다. 제갈량이랄까, 한명회랄까, 그런 역할을 맡은 거죠. 남인정권을 서인으로 물갈이하는 경신환국은 김석주의 작품입니다. 숙종초반 10년은 분신과 같은 2인자 김석주의 서포트를 받아 남인과 서인 모두를 컨트롤하는 형태를 띕니다. 즉위10년째 되던 해에 김석주가 병으로 사망. 

김석주 사후에는 선조와 비슷한 정치테크닉을 발휘. 아무도 절대신임하지 않고 끝없는 손바닥 뒤집기만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송시열집단인 노론에 대한 여러번의 도전세력이 있었고, 숙종은 번번이 이들 소수파를 적당히 비행기 태워주다가 토사구팽.
윤휴, 장희빈과 장희재, 윤증 등등이 잠깐잠깐 기회를 얻었으나 때로는 자폭(장희빈)하고 때로는 숙종의 돌연변심(윤휴) 때문에
노론 세력 앞에 공중분해 됩니다. 
물론 만년야당 남인이 집권을 담당하기엔 함량미달인 측면도 있어보이는게 사실이었습니다(ex.남인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이 저지른 언터처블한 비행이라던지..).

국정운영의 측면에서는 국방을 강화하고 역사의 패배자들에게 명예를 회복(이 때 공정왕->정종, 노산군->단종으로 복위됨)시켜주는 개혁적 조치를 취하는 면모도 있지만, 호포법 등등 근본적 변혁을 꾀하는데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리학 세계관 내에서의 개혁조치일 뿐. 세계는 요동치고 있는데.. 

숙종에 대한 총평을 내리자면, 밀당의 달인 + 손바닥 뒤집기의 1인자 + 극단에 이른 당쟁을 통째로 이용해먹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근의 동이나, 기존의 각종 장희빈사극에 나오는 우유부단한 난봉꾼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인물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숙종이야말로 교활하고 노련한 권모술수류 甲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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