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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정말 더러웠나?
게시물ID : humorbest_3966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eroSpera
추천 : 33
조회수 : 9603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10/16 17:44:20
원본글 작성시간 : 2011/10/15 23:47:30
학교에서 오침에 애쓰셨던 분들을 위해 기억을 되살려보면, 우리는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로 시대 구분을 느슨하게 하고 있다. 모든 지역에서 다 이렇게 구분이 먹히는 것은 아니고 대개 유럽 중심이지만, 인류 문명 발생부터가 고대의 시작이고, 중세는 4세기 경 게르만 이동과 서로마의 멸망 정도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15세기) 경까지를 느슨하게 칭하며, 근세는 르네상스가 펼쳐진 14세기 경부터 18세기 프랑스 혁명 정도까지, 근대는 18세기에서부터 20세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를 현대라고 칭하면 될듯 하다. 학자마다 이 기간의 정의가 달라질 수도 있고, 유럽 외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 편이지만, 여기서는 대충 15세기까지 중세라고 보자. 그렇다면 베르사유(Versailles). 베르사유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알려지게 된 때는 언제일까? 중세시대 베르사유는 그저 영주의 작은 성과 마을이 있는 중세시대에 흔해빠진 자그마한 마을일 뿐이었다. 파리와 드뢰(Dreux), 노르망디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조금 유명한 위치가 될 수도 있었던 이 동네는 백년전쟁과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격감하여 중세 내내 아주 보잘것없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베르사유는 1575년 알베르 드 공디(Albert de Gondi)라는 인물이 앙리 2세 치하에서 영지로 획득했는데, 17세기 초 루이 13세는 공디로부터 사냥에 여러번 초대를 받으면서 이 베르사유를 마음에 들어한 모양이다. 그래서 베르사유에 작은 성(chateau)을 짓고 행궁(行宮)처럼 쓰려 한 모양이다. 그래서 루이 13세는 베르사유를 공디 가문으로부터 다시 사들였다. 루이 13세의 뒤를 이은 루이 14세는 프롱드 반란 시기를 겪고 자라면서 절대왕정을 추구했고, 그래서 베르사유를 거점으로 삼아 기존의 작은 샤토를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바꾸는 공구리우스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1669년. 이것이 우리가 현재 베르사유 궁전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베르사유 궁전은 17세기 중반 넘어서나 생겨나는 장소. 중세가 아니잖아?!! 그렇다. 근세 시대(Early Modern Age)다.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으므로 중세는 더럽다 라는 말은 그래서 문제가 있다. 잠깐,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던가? 루이 14세 시대에 베르사유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화장실은 없었다. 중세식 성의 화장실은 푸세식도 아니고 무려 떨세식(?)이었는데, 성벽에 붙은 구멍에 응가를 싸면 구멍을 통해서 흘러내린 응가가 성벽 밖의 해자로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전쟁용 성벽도 아니고, 궁전에서 그런 성벽에 똥칠하는 방식을 쓸 수는 없는 문제 그래서, 루이 14세 시대에는 작은 방(cabinet 또는 lieu라고 부르는)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엉덩이 닿는 부분에 구멍 뚫린 의자(chaise percee)를 넣어놨다. 그 의자 아래에는? 요강을 놓는 거지(.....) 우리가 화장실 하면 떠올리는 느낌은 무엇인가? 냄새를 지우기 위해 돌아가는 환기 팬, 젖은 물기, 싸늘함... 적어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포근한 방과는 아주 다른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cabinet, 저런 방은 궁전 안에 아주 여러개가 있고, 어떤 방이던 궁전답게 수수하다고는 말못할 공간이며 일종의 다용도실이다. 일상적인 방에 가까운 공간이고 절대 우리가 화장실 하면 떠올리는 그런 시설이 아니다!!! 그 방에 구멍 뚫린 좌변기(?)와 요강만 놓으면 거기가 어디든 그냥 그자리가 화장실이 된다.(.....) 당연히 침실에도 요강을 갖다놓았고, 귀하신 분들은 아예 여행중에 쓰기 위한 휴대용 이동식 좌변기+요강도 가지고 있었을 정도. 이 요강으로 일보고 길가에 뿌렸다더라~ 라는 썰이 베르사유가 벽에 똥칠하는 공간이라는 억울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더군다나 이걸 중세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심각한 오류. 여기서 베르사유의 명예를 위해서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건축기술이 발달하면서 베르사유 궁전에도 화장실은 추가됐다. lieu anglais라고 부르는 수세식 화장실은 18세기에도 100여개가 넘게 존재했었다. 현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런 근세식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베르사유 궁전의 개수 과정에서 화장실이 존재하던 부분이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으로. 현재 베르사유에 있는 화장실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현대에 추가한 것들이다 망토와 하이힐이 길가에서 오물 뒤집어쓰기/밟기 싫어서 만들어졌다는 카더라도 카더라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힐은 원래 패션 용도와 키 커보이려고 만든 것이다. 하이힐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는 오를레앙 공(장래의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부인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는 몹시 키가 작아서 일부러 커보이려고 하이힐을 주문해 신었었다. 이것이 1533년. 생각해보자, 하이힐 신고 다니는 귀족 마님이 길가에서 오물 밟고 다니게 생겼나? 게다가 하이힐까지 가지 않아도, 뒷굽이 두툼하고 높은 형태의 신발은 원래 말탈때 발이 등자에서 빠지지 않게 하려고 턱을 만들어놓으려는 목적에서 등장한 것이다. 망토는 그저 고전적인 외투일 뿐이고 말이다. 그럼 베르사유 궁전 말고, 중세인들은 정말 씻기 싫어했는가? 이것도 글쎄올씨다 이다. 사실 유럽에서 씻는 문화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중세인들의 사상과 영혼을 지배하던 기독교에서는 청결하게 씻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청결을 좋아했다. 사제들은 주말에 교회에 올때는 꼭 씻고 오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농노와 평민들도 교회 가기 전에 씻고 가기는 해야 했다. 물론, 일상적인 삶에서 깔끔함을 챙기기에는 평민의 삶은 너무 고단했고, 평소에는 자기전에 씻기는 커녕 돼지를 집 안으로 들여와서 껴안고 잘 정도였다 - 그래야 난방비도 안들고 따뜻하니까! 하지만 귀족들은 평민과 자신을 구별짓는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청결함'을 꼽았다. 그래서 청결하게 씻는 것은 귀족의 소양으로 중요한 행위였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중세시대에 개인이 씻을만한 공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사실 옛날에는 씻는다는 행위는 개인적이기가 힘들었다. 초창기 기독교를 믿던 유럽인들은 죄많은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그래서 목욕이란 행위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믿는 귀족은 목간통에다가 시녀들이 떠다놓은 물로 조용히 혼자 씻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물떠다줄 시녀가 없는 평민들은? 개울가에서 알몸으로 드러누울까? 제대로 목욕을 한다는 말은 그래서 대중목욕탕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대중목욕탕은 물레방아 같은 제법 큰 시설이 필요한 물건인데, 목욕 행위가 인기를 끌고 수차 시설이 흔하게 사용되면서 12세기 경을 넘어서면 어지간한 마을에는 공공목욕탕 하나씩은 생겨났다. 여행 도중에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것이다. 그런데 너도나도 알몸에 혼탕이다보니 대중목욕탕은 일종의 공공 매춘장소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목욕을 권하면서도 반면에 매춘장소인 대중목욕탕은 비난할 수 밖에 없었고 ("거기가 천국이 아니라 저 위쪽이 천국이니라"), 고결한 시늉을 하는 남성의 자신감의 징표에 자신이 없는 기사와 귀족들 일부도 우직하게 혼자 씻는 것을 고집하곤 했다. 중세는 그랬는데, 여기에 몇가지 요소가 끼여들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16~17세기) 시대에 영혼의 깨끗함을 내보이는 것은 몸 보다는 복장의 단정함이라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깨끗한 복장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영혼의 고결함을) 보여준다는 유행이 번지면서 이것이 르네상스 이후로 패션의 등장, 화려하고 멋있어보이는 복장의 등장을 가속시켰지만, 반면에 몸의 정결함의 추구에 대해서는 느슨해져버렸다. 그래서 항상 온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부분만 씻으면 된다고 했다. 게다가 대중적인 의류가 모직에서 세척하기 쉬운 면직이 되면서, 정결해보이는 것이 의복에 의존하는 부분이 점차 커졌다. 더불어 흑사병 시대에 만들어진 잘못된 민간처방 - 덜 씻어야 병에 안걸린다 - 이나 몸의 일부만 씻는 것이 건강에 좋다 같은 허튼소리가 의학상식으로 널리 퍼지고 일반화되면서 청결은 더욱 순위가 떨여졌고 주말에는 목욕보다는 빨래하는게 더 중요한 일상이었다. 한증탕이 유행하면서 귀족들 마저도 목욕보다는 한증탕을 많이 애용하고, 르네상스 시대에 향수가 보편화되면서 향수의 사용으로 냄새를 감추려는 행위가 또 생겨났다.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에서는 레콩퀴스타가 있기 전까지는 무슬림과 카톨릭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서 목욕과 청결 문화가 선진적이면서 또한 보편적이었는데, 레콩퀴스타 이후 기독교는 아주 극단적인 시선으로 개종한 무슬림과 유태인을 감시했다. 그리고 그 감시에는 '무슬림적인 의식행위인 목욕 의식'도 포함됐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근세 초기로 보는게 일반적이니, 중세와 더러움을 결부시키려는 것은 좀 편견이 지나치다. 중세인들이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목욕은 하고 잘 다녔고 어쩌면 르네상스 시대나 18세기인보다 중세인들이 더 잘 씻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중세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오해가 크다. 19세기 학자들은 High Middle Age 이전 중세시대에 관한 사료를 찾기 힘들어서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면서 문명이 퇴보했다고 말했었지만, 현대에는 중세 관련된 사료와 유물이 차근차근 발견되면서 중세 암흑기라는 명칭을 뒤집고 있어서 현대의 사학자들은 중세 암흑기라는 표현 자체를 꺼리고 있을 정도다. 중세시대에도 차근차근 발전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흑사병이나 전염병이 중세의 교역과 이동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반면에, 그로 인하여 인구가 격감하자 인력에 의존하던 각종 작업이 좀 더 전문화된 기술자의 협동 공방의 등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다른 요인들 역시 다른 요소가 작용한다. 지극히 높은 영아사망률은 청결의 문제도 있었지만 기근의 문제도 심각했으며, 전반적인 인구 감소는 전쟁과 폭정도 크게 기여했다. 중세라는 시대가 너무 길고 다양하기 때문에 중세는 더러워! 하고 보편화해서 말하는 것은 매우 과격한 처사다. 중세인들은 확실히 우리 눈으로 보자면 더럽기는 하겠고 그 격차는 하층민일수록 더 심각하지만, 그렇다고 중세 유럽 전체가 일년에 한번 때미는 거대한 거렁뱅이들의 구렁텅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동방에서 선진 목욕문화도 전파되었고, 중세 초기에 비누의 상업 거래 흔적도 발견되고 (특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로마 시대의 목욕 문화가 중세에 접어들며 상실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거짓이다. 중세시대 대중목욕탕의 유물이나 관련 사료도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제발 중세와 근세는 좀 구분하자. 그럼 중세에 거리 밖으로 요강의 똥물(....)을 던졌다는 것은? 이것도 중세만 괜히 씹어대는 뻥이 가미돼있다. 오물을 밖으로 내던지는 것은 사실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관습(?)이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Aeschylus는 창밖으로 던지는 요강의 내용물을 missiles of mirth(환희의 투척물)이라고 향기로운 언어를 써서 표현했는데(.....) 이것이 만들어내는 피해 때문에 로마 초기 법률에는 Dejecti Effusive Act라고 해서 창밖으로 오물을 내던지는 것을 금지했다. 로마 하면 상하수도 설비에 공용 화장실을 갖추고 공공위생을 널리 퍼트렸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흔히 로마에는 저런 행동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로마 시대부터 저런 법률로 단속해야 할 정도로 창밖으로 오물을 내던지는 행위가 만연했던 것이다. 저 법률은 사실상 오물을 밖으로 내던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하수도 설비를 갖추지 않은 집이 상하수도를 갖추도록 강제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AD 100년까지는 로마에서 모든 가정이 상하수도를 완비하지 못했다는걸 생각하자. (다만 Dejecti Effusive 법률은 낮 동안에만 적용돼서, 야밤에 돌아다니다가 똥물을 뒤집어써도 하소연할 수는 없었다.) 중세시대에도 오물의 관리와 오물취급의 수준은 마찬가지였다. 로마처럼 상하수 시설을 완비하지는 못했지만 사실 대개의 마을에는 이런 오물이 흘러내릴수 있는 하수로를 파놓고 있었다. 단지 뚜껑을 안덮어서 냄새가 좀 심하긴 할것 같은게 문제지 집안에 하수도가 없다보니 평민들은 수챗물 같은 것은 부엌에서 창밖으로 쫙쫙 뿌려버렸다. 요강에 든 똥물만을 던지는게 아니다! 오물의 비율은 대소변보다는 아무래도 부엌에서 나오는 수챗물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사실 똥물을 길가에 뿌리는 것은 중세인들도 몹시 불쾌하게 여겨서, 영국왕 리처드 2세는 Statuto quo nut ject dung, 똥을 내버리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을 정도다. 게다가 엄격하게 말하자면, 창밖으로 오물(수챗물)을 던지는 것은 아무데나 휙휙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집 뒤나 길가에 파놓은 도랑에다가 내버리는 것이었다. (이 도랑은 빗물이 길에 고이지 않고 흘러지나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하수로이기도 하다.) 이걸 대로변에 파놓은 경우에 오물을 뒤집어쓰는 불운한 사람이 생기는 것인데... 그래서 오물을 내던지기 전에는 반드시 창밖으로 정해진 고함을 질러서 경고를 해야하는 규칙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로마처럼 아예 법을 정해두고 벌금을 중하게 물 수도 있었다. 이 경고하는 고함은 영국식에서는 Garden l'eau 라고 하는데 발음은 가듸-루! 정도 된다. 뜻은 "물뿌린다 조심!" 중세시대 마을 내 길의 청결은 그 길에 닿아있는 집이 구역을 정해서 책임지는 시스템이라, 더러우면 그 집이 알아서 청소를 해야 했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규제가 항상 강력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었고, 귀족나으리가 행차하시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할때 책임소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은 오물만 버리는게 아니라 지나가던 말도 볼일을 보고, 뒷뜰에 풀어놓은 돼지새끼가 (중세인들은 집안에서 껴안고 잘 정도로 돼지를 자주 키우고 좋아했다) 자유를 갈구하는 한마리 백돼지처럼 길가로 탈출하는 일도 있었다. 말, 소, 돼지... 이런 축생이 길가로 돌아다니면서 만들어놓는 향긋한 냄새는 현대인들은 잘 모를수 있겠지만, 우리나라만 해도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세대쯤 되는 분들 정도라면 시골서 맡아보신 추억이 있으시리라. 이런 환희의 투척물 관습이 확실히 없어지려면 하수도 시스템의 정비 뿐만 아니라 집 내에 화장실까지 구비해야 하는데,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상하수 정비하고 수세식 화장실과 휴지가 등장한 18~19세기 들어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마당 한켠에 푸세식 화장실을 만들어놓고 똥지게 지고 날랐다는걸 생각해보자 그러므로 중세 유럽에만 청결하지 못하다는 편견을 물리는 것은 곤란하며,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전 세계를 막론하고 향긋한 향기 정도는 일상사였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중세인들의 청결에 대한 시각은 훨씬 바뀔 수 있을 듯 하다. 요약을 해보자면 중세 유럽인들 현대 기준 아래 상대적으로 더럽긴 하지만 아예 안씻는건 절대 아니고 의외로 씻는거 좋아하기도 했다. 중세인들이 길가에 오물 버렸다는건 그 잘난 로마시대도 별수 없던 일 안씻고 악취를 향수로 감췄다 같은 것은 완전히 시대착오. 중세랑 근세는 좀 구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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