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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조선의 인물들 2부
게시물ID : humorbest_3969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넥스트
추천 : 51
조회수 : 3934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10/17 16:50:16
원본글 작성시간 : 2011/10/17 16:17:12
1. 문종 이향
역대 제일의 먼치킨인 아버지와 비명에 죽은 아들 그리고 반정을 일으킨 동생의 이야기가 워낙
드라마틱한 까닭에 한번도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한 안습의 임금
허나 실제로는 10년만 더 살았어도 아버지에 버금가는 업적을 쌓았을거라 이야기 할 정도로
능력면에서 아주 뛰어 났음.
요절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으나 조선의 황금기를 만들었다는 성종 보다도 오래 살았음.
단지 세자 시절만 30년을 보내고 임금으로 제위한 기간은 고작 2년이었던 까닭에 자신의
치세를 만들지는 못했음. 그러나 세종조 후반의 업적중 상당수는 아버지의 명을 받은 문종이
세자시절 이루어낸 업적들.

세자시절 얻은 첫번째 부인과 아주 사이가 안좋아서 결국 세자빈은 자신을 찾지 않는 세자대신
레즈비언 짓을 하다가 걸려서 쫓겨났음
단종과 경혜공주 모두 후궁 소실임. 후에 현덕왕후로 추존받는 후궁 권씨가 단종을 낳자마자
죽었고 이후에 부인을 얻지 않아서 조선조에서 유일하게 재위기간중 아내를 두지 않은 임금으로 남음.

유약한 임금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무에 재능이 뛰어 났음. 외모는 수염이 아주 풍성해서 마치
관우같은 이미지 였다고 하고 활도 아주 잘 쏘았으며 화차같은 신무기를 직접 설계했고 4군6진 개척도
문종이 세자시절 이루어낸 업적이고 병력 증강및 군제 정비도 세자시절 문종의 업적임
훈민정음 창제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함
흔히 장영실이 만든걸로 알고 있는 측우기 역시 문종이 세자시절 낸 아이디어로 장영실이 만들어낸
물건

세종조 후반은 사실상 문종이 세종대신 대리첨정을 하며 많은 부분을 담당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오랜 시간 임금역활을 한거라 볼 수 있음. 하여간 역대 가장 과소 평가 받은 왕

2. 세조 이유
흔히 수양 대군으로만 알고 있으나 대군으로서의 칭호는 여러번 바뀌었음
진평-함평-진양을 거쳐 수양이라는 군호를 받았는데 실제 대군 시절중 가장 길었던 때는
진양대군 시절이었음.

보는 시각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인물이나 과거에는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정부가
득세하던 까닭에 대의를 위해서 어쩔수 없이 피눈물을 머금고 반정을 일으킨 인물로 묘사된적이
많았음 허나 이는 지나친 미화. 오히려 최근작인 공주의 남자에서의 모습이 실제 세조와 가장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음

왕자 시절부터 야심이 많아서 아버지와 형 앞에서 자신의 무예를 신나게 뽐낸 경우도 많았음
세종이 임종때 측근 대신을 불러 아들이 아닌 세손 즉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걸로 보아
세종도 어느 정도 후일에 대한 예상을 하고 있었던 걸로 보임.

일단 패륜에 대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을 할 수가 없는 인물
조선조 임금중에 동복 형제를 둘이나 죽인 인물은 세조가 유일함 왕자의 난으로 형제끼리 칼부림을
한 이방원 조차 동복 형제를 죽이지는 않았음.
태종이 죽인 방석과 방번 두 왕자는 모두 이복형제.
2차 왕자의 난때 방간은 방원과 칼부림까지 벌였으나 방원은 방간을 죽이지 않았고 방간은 그덕에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 죽었음
그러나 세조는 단종즉위 시절 왕실의 우두머리 역활을 한것이 자신이 아닌 동생 안평이었고 안평이
단종의 후견인 노릇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음.
금성역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의 손에 죽었음. 금성이야 직접 반정을 모의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안평의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음

허나 여기 까지는 약과
형 문종의 무덤을 지키던 민신과 그의 다섯아들을 무려 형 무덤 앞에서 전부 목을 쳐버렸음.
그리고는 나중에 생전에 자신과 사이가 않좋던 형수 즉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해쳐버린걸로
모자라 그 시신을 관째 강에 내다 버렸음
더 황당한 것은 이 무덤이 형수의 무덤이자 형의 무덤이었다는 것
즉 선대왕이자 자신의 형이었던 문종과 형수가 합장되어 있던 무덤을 파헤쳐 관째 내다버린것
이 정도면 가히 연산군도 형님하고 절할 정도의 패악질이고 광해군은 억울해서 땅을 치고 뒤집어 질 노릇.

거기다 계유정난의 명목상의 이유는 왕권을 위협하는 권신들을 쳐내고 왕권과 왕실의 위엄을 되찾는다였는데
정작 자신과 반정을 함께한 공신들에게는 땅이며 노비며 재산이며 미친듯이 다 퍼주어서 결국 이들이 훈구파로 불리우는 조선의 대표 수구세력들의 시발점이 되는 역활을 했음.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동지는 물론. 자신과 세종의 외척까지 모조리 도륙내 버린 이방원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점.

술을 몹시도 즐겨 일과의 시작이 대략 오전 11시였다고 함 즉 숙취때문
술자리에서 신하들 괴롭히는 걸로도 유명했는데 반정을 함께 한 공신중 하나였던 양정은 술자리에서
노닥거리는 세조를 보고 그러실거면 차라리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했다가 목이 달아났고
병조판서 이계전은 술에 취한 세조에게 그만 자시고 주무시지요 했다가 머리채 잡혀 끌려 나와
곤장을 쳐 맞았음.

하여간 이러한 성격 때문에 신하들도 감히 세조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음
왕자 시절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도심 한복판에 원각사를 지었는데 이때도 신하들 누구하나
반대의견을 내지 못하고 칭송하기에 바빴다고 함.
또 신하들에게 한여름 뙤약볕에 솜옷을 입고 업무를 보라고 지시하며 극기훈련을 시켰는데
흠좀무인건 자신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난로까지 피웠다고 함. 분명 한여름에.....

하지만 스스로는 술을 좋아하는것을 제외하면 무척이나 검소했고 부인인 정희왕후와는 아주 금실이 좋았고
종종 어전에서도 중전의 의견이 이러하더라 하고 신하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음
또한 궁내에서도 항상 무명옷에 짚신을 즐겨 신었고 종종 암행을 나가 백성들에게 직접 이야기 듣는것도
즐겼다고 함. 뿌리깊은나무 4화에서 새종이 대신들과 설전을 벌이는 원인이었던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시킨
것도 바로 세조

3. 진주목사 김시민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
그러나 이순신과 권율은 잘 알려진데에 비해 김시민은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외에는
별 다른 이미지가 없는 인물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는 더 유명함.
진주대첩에서 예상치도 못한 패전을 당한 일본군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는데 히데요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광분했다고 함.
김시민은 진주대첩 마지막에 흉탄에 머리를 맞고 전사했으나 일본군은 김시민이 죽은지도 몰랐고
정작 그의 이름 조차 몰라서 진주목사라는 그의 직책이 이름인줄 알고 있었다고 함.
이 원한이 결국 정유재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으로 재발되었고 히데요시는 일본군 장수들에게
너네들 진주성 못넘기면 아예 씨를 말려 버린다 하고 겁을 주어 당시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 거의 전부인
10만 병력이 진주성을 포위 혈전끝에 성에 있던 백성까지 포함 약 5만이상이 죽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함 일본군은 이때 진주목사였던 서예원의 목을 베어 히데요시에게 여기 원수같은 목사놈의 머리를 베어 왔습니다 하고 바쳤다고 함. 그런대 정작 서예원은 2차 진주성 싸움 당시 가장 찌질했던 인물.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종종 목사라는 괴물이 나타나 일본군을 괴롭히는 연극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목사가 바로 김시민을 말하는 것. 즉 이름도 모르는 장수에게 대를 이어 벌벌 떨은셈.
왜란 종결후 충무라는 시호를 받음 즉 그의 시호는 충무공.
원래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장수에게 내려지는 시호로 조선조에서는 이순신 김시민을 포함한 9명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음

4. 퇴계 이황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자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그는 조선시대 주리론의 기틀을 마련했고 실천 보다는 철저히 이론과 개인의 수양을 중시했던
까닭에 매우 고리타분한 이미지이나 실제 그의 생활에서는 의외의 모습이 많이 보임

젊어서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둘째 부인을 얻었는데 이 둘째 부인이 정신이 좀 오락가락 했던 사람.
제사를 지내는데 차례가 끝나기도 전에 상에 놓인 배를 덥썩 집어 품안에 감추자 그의 형수가 크게 꾸짖었는데 이황은 "조상께서도 손주 며느리의 행동을 귀엽게 봐주실겁니다"하며 무마시켰다고 함
나중에 아내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너무나 단순명쾌하게 배가 먹고 싶었다고 답했는데 그러자 이황은
손수 배를 깍아 주었다고 함

둘째 아들이 결혼하고 일찍죽자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가 밤마다 외로움에 눈시울을 적시자 사돈댁에
편지를 보내에 며느리가 너무 불쌍하니 딸을 데려가라고 하여 재가를 허락했다고 함.

그가 58세 되던해에 32세의 갖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과 사단칠정논쟁(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을 벌였는데
햇병아리와 당대의 대학자라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무려 13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음. 이황은 기대승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하며 그의 이론을 자신이 받아들이기도 함. 이황이 당대에 어떤 위치의 인물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실로 그의 대인배적인 풍모를 볼수가 있는 예

율곡의 제자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서로 자신의 스승이 성현이다며 논쟁을 벌이다 결국 두 사람의 밤일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는데(도대체 왜?)율곡은 대 유학자 답게 아주 조용히 거사를 치르는 반면 퇴계는 그야말로 온갖 기교와 체위를 구사하며 격렬하게 즐겼다고 함.
이에 퇴계의 제자들이 우리가 졌소 하고 무릎을 꿇었고(이긴거 아님?) 스승에게 찾아가 왜 그리 음탕하시냐고 따져 묻자 이황은 껄껄 웃으며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그런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퇴계의 후손은 매우 많았으나 율곡의 후손은 당대에서 끊어져 버렸다.

이황을 보건데 유학자가 고리타분 하거나 예법만 중시하고 여자를 무시하고 한다는 이미지는 결국 후대의 유학자들의 사람 됨됨이 탓일 뿐..........정작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이황은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었음.


번외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대부분 둘이 친구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항복이 6살이나 많다
-사약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까? 정답은 아니다 사약을 세사발이나 먹고서야 죽은 인물이 있다. 바로 우암 송시열 첫번째 사약을 먹었을때는 되려 병을 고쳤다고 한다(뭥미?) 결국 나중에 두사발 더 마시고야 사망했음
참고로 송시열은 조선조 최초로 여군 창설을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오늘날 오시면 남하당 대표가 되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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