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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스탈린이 모택동 잡으려고 일으킨 것
게시물ID : sisa_3995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무디키잉
추천 : 1
조회수 : 60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09 21:26:33

이세기 前 통일부장관 "한국전은 애치슨 선언에 대한 소련의 반격"


  "스탈린이 모택동 잡으려고 일으킨 전쟁이 바로 한국전이다. 통일이 되려면 6·25전쟁 발발 과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세기 前 통일부 장관이 3일 오후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조갑제의 현대사 강좌’ 강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前장관은 이날 ‘6·25는 누가 일으켰는가?’ 라는 주제 강연에서 6·25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미끼로 던져 미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이게 한 뒤 중국의 등을 밀어 미중이 싸우게 한 것이며 또한 에치슨 연설에 대한 스탈린의 대반격 이었다고 전했다.


 다음은 이 前장관이 강연한 내용과 관련, 조갑제닷컴에 게재(5.26)된 1979년 3월 ‘마오쩌둥·스탈린 간의 갈등과 한국전쟁’ 주제 박사 학위 논문 일부임.(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 만주를 둘러싼 중소 갈등

 1949년 신중국의 수립으로 1945년에 형성된 얄타체제가 붕괴되면서 생긴 동북아(東北亞)의 커다란 힘의 공백 상태에서 중국과 소련이 격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북아에서는 일본의 패망(미국의 일본 점령)과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 점령, 그리고 소련의 만주 지배가 이뤄졌다. 1945년 초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흑해(黑海)의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결과였다. 사실상 미국과 소련이 동북아 지역을 반분(半分)한 것이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 중국이 수립됨으로써 얄타체제가 흔들리게 되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의 중국을 상실하고, 소련은 1945년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와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점령하고 있던 만주를 토해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스탈린으로서는 양대(兩大) 진영의 대결 논리에 따라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자국(自國=소련)을 중심으로 한 1국(종주권) 체제에 묶어 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쟁국인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중국 공산당 정부가 소련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 16일,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약 70일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길고 긴 협상, 전투 아닌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역사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두 가지 과제를 갖고 소련을 방문하였다. 최대 현안은 중국이 스탈린 휘하의 일국(一國)체제에 종속되지 않고, 소련과 형제적·수평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1945년 얄타 비밀협정에 따라 종전(終戰) 후 소련이 차지하고 있던 동북3성 지역, 즉 만주를 되찾는 일이었다. 양자 간의 협상은 순탄치 않았다.

 이게 한국전쟁 발발과 전쟁의 과정을 좌우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次敵으로 主敵을 친다

 역사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동북 지역인 만주는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 혹은 진원지(震源地)와도 같았다. 얄타협정(1945년 2월)을 통해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대가(代價)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만주를 소련에 주기로 약속한다. 얄타협정은 ‘1904년 일본의 공격으로 제정(帝政) 러시아가 침해당한 예전의 권리를 회복한다. 이를 위해 소련과 중국 국민당 정부가 동맹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을 명시한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 시(1945년 11월 예정) 예상되는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체결한 이 같은 협정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사망 후 미국의 국익(國益)에 반하는 것이란 의견이 대두한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하여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고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原爆)을 투하하였지만 8월 9일 소련의 참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련은 종전(終戰) 직전인 8월 14일에는 얄타협정에 따라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해 만주를 확보했다.

 중국을 통일한 후 대등한 관계에 입각한 중소조약을 새로 맺어 만주를 되찾으려 하는 마오와 스탈린의 협상은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중소를 갈라놓기 위하여 외교적 공세를 펴고 나온 것이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오 사이의 협상이 한창일 때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대중(對中) 화해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중국과 소련을 이간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 선언에서 미국은 중공혁명의 성공을 ‘아시아 민족주의의 승리’라고 고무하면서, 중국의 신장(新疆) 지역과 만주에 대한 소련의 야심을 폭로한다.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국의 도서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다.

 애치슨 선언은 진행 중인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협상에 긴장과 갈등·마찰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차적(次敵·중국)을 감싸 안아 주적(主敵·소련)에 대항하도록 하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 미국의 방향 전환

 당시 스탈린은 만주를 고수할 명분이 없었다. 마오쩌둥을 계속 홀시할 경우 중국이 미국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우려했다.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만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중요한 것은 길고 긴 협상 과정에서 그는 자력(自力)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중국이 자국의 종주권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에 우호적 제스처를 써서 미중(美中) 국교 수립 교섭을 시작, 중국과 소련을 갈라놓으려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중소 양국(兩國)이 동맹조약을 맺자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결정책으로 선회한다.

 애치슨은 정책실장 폴 니츠를 시켜 국가안보회의(NSC) 전략문서 68을 만들어 6·25 직전에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다. 이 문서는 국제 공산주의를 ‘서구(西歐) 문명의 적(敵)’으로 규정, 자유진영의 장점인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침투시켜 붕괴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라 대만도 포기대상에서 보호대상으로 바뀌었다. 이 문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시켜 소련을 상대로 군비경쟁을 벌임으로써 경제력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함의(含意)도 담았다. 문제는 대결정책 추진의 계기를 잡는 일이었다. 이 계기를 제공한 것이 스탈린과 김일성이었다.

 ▲ 한국전은 애치슨 선언에 대한 소련의 반격

 스탈린은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른 마오쩌둥이 제2의 티토가 되기 전에 제어하고 압박해 자신의 예속하에 두고, 적대국인 미국을 시험하고 흔들어 힘을 뺄 수 있는 대전략이 절실했다.

 1950년 3월 30일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미국의 애치슨 선언 등 변화된 정세를 거론하면서 남침계획을 승인해 줄 것을 간청했다. ‘만주를 상실한 허탈감 등으로 상심해 있던’ 스탈린은 이전과 달리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흔쾌히 허가하면서도 반드시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하라고 지시한다.

 스탈린은 소련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과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개입이나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해 국경을 따라 완충지대를 확장, 중국을 포위·견제하고, 만약 개입하더라도 미중 간의 전쟁을 통해 신중국을 미국의 화약고 속에 빠져들게 해 자국의 예속하에 두며, 특히 미국의 힘을 중국의 늪 속에 빠뜨려 유럽에서 힘의 우위를 도모하려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소련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용이하게 했다. 소련의 안보리 불참 의도는 미국 등 서방의 참전을 유도해 미중 사이에 분명한 적대(敵對)관계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중국을 자국의 손아귀에 두려고 한 것 같다.

 미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北進)은 중국의 개입을 초래해 마침내 한국전쟁은 미중 간의 국제전이 되고 말았다.

 애치슨 선언을 통해 중소 간의 이간과 불화를 획책한 미국은 그로부터 5개월 후 스탈린의 치밀한 책략에 따라 한반도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미국의 애치슨 선언에 대한 스탈린의 대반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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