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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기념 옛 산하의 오역 끌어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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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영할트
추천 : 0
조회수 : 40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13 15:38:07

6월항쟁기념 옛 산하의 오역 끌어오기 


1987년 7월 9일 대한민국 광장의 시작 

우리에게는 광장의 역사가 없었다. 무슨 기념일이든, 모모한 날이든 우리의 '광장'에는 단상에 도열하여 자리를 빛내는 '내빈'들의 격려사들의 성찬과 그 앞에 단정히 줄지은 의자 내지 군중들, 그리고 축하의 박수 내지 묵념의 경건함만 그득했다. 광장에 수만 인파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는 광장이란 해외의 기행 풍물에서나 만났을 뿐, 고구려의 동맹제나, 부여의 영고 같은 고유의 명절에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다는 동이족의 문화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특히나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그 뜻을 나누고 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광장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1987년 7월 9일 실로 거대한, 그리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갈무리될 광장이 탄생한다. 


1987년 6월 9일 6.10 항쟁의 불이 당겨지기 전날, 연세대 시위에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은 그로부터 한 달을 더 살았다. 그 친구, 선후배들, 그리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학생들과 함께 전경들의 방패에 매달린 시민들이 전두환 정권과 사생결단을 내던 한 달이었다. 이한열은 무의식 상태에서나마 그 치열하고 장엄했던 한 달을 함께 한 후 죽었다. 7월 9일은 그의 장례식이었다. 

연세대 교정에서 올려진 그의 영결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생생히 남아 있는 명연설을 남긴다. 그것은 유려한 문장과 유창한 달변으로 구성된 연설이 아니었다. 그저 호명이었다. 이름들의 나열이었다. 아니 이름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들으며 사람들은 가슴에서 끌어올려지는 가래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이재호열사여. 이동수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박종철 열사여... 광주 2천 영령이여....” 학생들도 있고 노동자도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아무런 순서도 없이, 이유도 없이 머리를 스쳐가는 구름 같은 삶과 죽음들을 불렀다. 노동자에게 봉기를 호소한 것도 아니고 그저 법을 지키라는 절규와 함께 몸을 불살라야 했던 전태일, 양심선언문을 읽은 후 스스로의 몸에 칼을 꽂고 죽어간 김상진, 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끝내 기업주에 배신당하고 경찰에 짓밟히다 죽어간 김경숙,,,,,, 그 이름들은 불의 창이 되고 시퍼런 화살이 되어 귀를 뚫고 기억을 관통했다. 아마도 문익환 목사도 그 면전에서 불덩이가 되어 떨어져 내렸던 고 이동수를 부를 때는 몸서리를 쳤으리라. 


그 많은 죽음들 가운데 부산의 아들 박종철이 물꼬를 트고 수십만의 손과 발이 연 물길 위에서 광주의 아들 이한열은 어머니와 함께 광주로 향했다. “한열아 가자. 이제 우리 광주로 가자.” 어머니 배은심씨는 절규했다. 하지만 광주에 가기 전 이한열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그의 영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물결은 한 곳으로 향했다. 상여를 멘 사람들, 그 상여를 지키고자 인간띠를 두른 사람들, 그리고 지난 6월의 승리를 만끽하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역사 앞에서 용감했던 학생에 대한 고별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 1987년 한국에서 밥 먹고 숨 쉬며 살아가는 자로서 이건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수천 수만 수십만 갈래의 흐름이 되어 한곳에 모였다. 서울 시청 앞이었다. 사람들의 홍수였다. 사람의 사태였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한 끝의 거리낌도 없이 대한민국 국민들은 오래간만에 열어젖힌 광장의 주인이 됐다. 누군가의 통제가 통할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할 엄두도 안나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인파였지만 그 속에는 질서가 있었고 평화가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났지만 가슴 속으로는 뿌듯함이 솟았다.

이한열의 상여 앞에서 시민들은 조기 게양을 외친다. 프레지던트 호텔, 플라자 호텔 등 주변의 모든 건물의 태극기가 조기로 바뀌었지만 시청만큼은 관료 조직의 복마전답게 완강하게 버틴다. 수만 명이 조기 게양을 연호했으나 그 메아리가 없자, 시민들은 시청으로 진입하여 자신들의 의지로 서울 시청의 태극기의 높이를 낮추었다. 시청을 경비하던 경찰 병력이 있었으나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한 발 물러서 시민들의 발길을 막지 않는다. 

시청에 뛰어든 사람들은 한 달 전만 해도 정권이 눈을 부라리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릴 뿐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았다는 이유로 "불법부착물 부착" 혐의로 멱살을 잡혀 끌려가고, 더러운 놈의 세상! 욕설을 퍼붓다가도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이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었고, 자신들의 광장에서 그 등기 절차를 마친다. 몇십 분 뒤 권력의 핵심을 막아섰던 경찰력이 쏟아붓는 최루탄 앞에서 그 광장은 깨끗이 비워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 광장을 채웠던 사람들의 머리를 비우고, 그 감동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역사는 기억으로 유전된다. 시청 앞 광장은 이 날 이후 우리의 광장으로 자리매김한다. 모이자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되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칠색 팔색으로 싫어하는 이들에 의해 빼앗기거나 봉쇄될 경우 다시 찾아야 하고 열어야 할 광장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시작은 87년 7월 9일이었다. 월드컵의 붉은 함성도, 서울의 밤거리를 환하게 밝혔던 촛불의 바다도, 서울 광장을 둘러싼 차벽이 위헌이라는 헌법 재판소의 판결이 나던 날, 환호하며 모여든 시민들도, 87년 7월 9일 광장의 후예들이었다. 누군가 물꼬를 트고 여러 사람의 손과 발이 물줄기를 만들고 마침내는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이치는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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