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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선 대한민국 사법부(14)-명동성당 구국선언 사건
게시물ID : history_40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7
조회수 : 19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4/05 02:48:53
<맨 오른쪽이 이희호 여사. 구국선언단이 모조리 구속되자 그 부인들이 법정 밖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들은 복장을 통일하고, 남편의 수인번호와 같은 명찰을 가슴에 달고서 구호를 쓴 부채를 펼쳐보이는 등 기발한 방식으로 항의하였고, 이러한 항의방식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뒷배경없는 만만한 놈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빨갱이 누명을 씌운 인혁당재건위 사건과는 달리, 이번에는 3.1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한 번 넘어가보겠습니다. 시간순서대로라면 인혁당 직후에 다뤄야 할 사건에 몇 개 더 있지만, 우선은 구국선언 사건을 다루는 이유는 돈없고 빽없는 사람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인혁당)에 비해, 제대로 된 변호와 여론의 관심만 받으면(구국선언사건) 독재정권의 공작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2년 정도의 시간을 건너뛰어 구국선언사건을 먼저 본 뒤 인혁당 사건 직후로 시간을 되돌리겠습니다. 참고로, 이번 화는 주석에 있는 구국선언 서명자들의 면면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관전포인트입니다. ======================================================================================== 1. 원주선언 인혁당 사형과 월남전 패배에 이은 긴급조치 9호 발동 이래 한동안 민주화 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민주화 운동은 1976년 1월의 원주선언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시 원주는 지학순 주교, 김지하, 장일순 등이 살고 있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천주교는 신·구교의 분리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일치주간을 두고 있는데 이를 맞이하여 1월 23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신·구교회의 합동으로 열렸다. 기도회는 천주교 신부들 다수와 개신교의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조화순 목사와 함석헌 등이 서명한, 제목이 없는 반유신선언을 채택했다. 2. 3.1 명동성당 구국선언 이에 개신교 측도 시국선언을 해야할 자극을 느꼈다. 김대중 역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였고, 선언을 준비하는 이들은 반공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서명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련의 준비를 주도한 사람은 문익환 목사이다. 3·1민주구국선언은 개신교 쪽이 주도했지만, 발표 장소는 명동성당이었다. 3·1절이 다가오면서 발표 장소가 마땅치 않자 천주교 쪽에 명동성당의 3·1절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할 기회를 줄 것을 요청했다. 천주교 쪽은 이미 원주선언을 했기 때문에 3·1민주구국선언에는 다시 서명하지 않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되었지만, 개신교 쪽의 급한 요구에 선언 발표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그 당시에 김수환 추기경의 그릇은 그렇게 컸다(주1).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2천여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미사가 거행되었고, 미사의 마지막 순서로 바로 전날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주2), 정일형(주3) 등 11명이 서명한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그것으로 미사는 조용히 끝났고, 시위도 농성도 없이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3. 탄압이 시작되다 일은 다음날 벌어졌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날 재야인사들이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펄펄 뛰며 이들을 잡아들이라고 직접 지시했다. 그날부터 관련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3월 10일 검찰(주4)은 일부 재야인사들이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발표했다. 검찰은 죄질이 나쁜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주5), 문동환(주6), 이문영(주7), 서남동(주8), 안병무(주9), 신현봉, 이해동, 윤반웅(주10), 문정현(주11) 등 11명은 구속수사중이며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이태영(주12), 이우정(주13),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등 9명은 불구속으로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4. 법정 안팎에서 벌어진 쇼 1) 전무후무한 피고인들의 면면 : 명동사건의 공판은 긴급조치9호 관련 재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쇼였다. 우선 피고인들의 면면이 그랬다. 전직 대통령에, 유력 대통령 후보에, 전직외무장관인 최다선 의원에, 기독교의 내로라하는 지도자에, 긴급조치9호 발표 이후 해직된 5명의 교수가 포함되었으니 이런 화려한 멤버가 또 없었다. 피고인들 중에는 특별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 분들도 있었다. 76살의 고령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은 함석헌 선생은 상복을 입고 법정에 나왔고, 신현봉 신부는 피고인을 호명하여 앞으로 나갈 때면 한국이 인권과 민주주의가 죽어서 곡을 한다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며 나갔다. 변호사만 27명으로, 초대형 변호인단으로 구성되었다. 80년대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200여명의 변호사가 팔 걷고 나서는 등 대형 변호인단이 구성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70년대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홍성우 변호사는 “평소에 긴급조치같은 거 안 하던, 정치권에 있던 변호사들이 대거 거기 달라붙어서 좀 시끄러웠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2) 재판을 공개하지 않는다 : 재판 자체가 유신 정권이 꾸민 쇼였고 일부 피고인들과 변호인들도 쇼의 의미를 살렸지만 방청이 제한된 법정에는 실제 방청객보다 기관원들이 더 많았다. 당시 법원은 피고 1인당 방청권을 5매 발행했는데, 방청권에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고, 입장 시 주민등록증을 함께 제시해야 하며, 일단 퇴정 시는 재입장시키지 아니할 수 있고, 분실 시는 재발급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가족들이 보이지 않자 1회 공판부터 비공개재판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기도 했다. 방청석 맨 앞의 20석쯤은 기자석이었는데 항상 만원이었지만 신문에는 한 줄도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 후보는 최후진술에서 내지도 못할 것을 열심히 쓰는 기자들에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니들이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기자들은 변호인들이 ‘쓰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나오냐’고 놀리면 ‘민주주의 교실에 공부하러 다닌다’고 답하곤 했다고 한다. 3) 피고인 가족들의 갖가지 시위가 화제거리 : 진짜 볼거리는 법정 밖에서 벌어졌다. 가족들은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한복을 똑같이 차려입고 법정 주변을 행진하거나, 언론자유가 죽었다는 뜻으로 엑스표가 쳐진 마스크를 일시에 꺼내 쓰거나, 민주주의 회복 등 구호가 쓰인 양산을 한꺼번에 펼치거나, 공개재판이라고 쓰인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활보하였다. 가족들은 브이(V) 자를 새긴 보라색 ‘빅토리 숄’을 떠서 판매했는데, 정부 당국에서 한때 보라색 실을 팔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5. 논란이 된 사법부 독립 명동사건의 재판에서는 유달리 사법부의 독립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3ㆍ1선언 자체가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을 요구한다. 사법권의 독립 없이 국민은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시녀로 거느리는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며 사법부의 독립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공소장 부본이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즉각 전달되지도 않았고, 공판조서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재판장 전상석 부장판사는 검찰 쪽의 증인과 증거만 채택할 뿐 변호인 쪽의 증인 16명과 증거, 사실조회 요구는 거의 채택하지 않았다. 이돈명 변호사(주14)는 1심 재판장이 “너무 몰상식하게 재판을 진행했다”면서 1심은 “재판이 아니라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재판에서의 기싸움도 팽팽했다. 변호인이 윤보선을 '각하'라고 지칭하자 재판장이 '각하'호칭을 금지했다. 변호인이 김대중에게 '후보'라고 하자 검사가 항의하였다. 변호인이 '김대중 피고인은 일본으로 망명갔지요'라고 하자 검사가 '망명은 무슨, 도망갔지'라고 받아쳤다. 홍성우 변호사는 이것이 재판이라기 보다는 국회의 여야투쟁 같았다고 회고한다. 피차 쇼맨십이 너무 들어갔다는 것이다. 한편 변호인들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문제 삼자 성격이 괄괄한 재판장 전상석은 자신도 사법파동 때 사표를 썼다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사법권에 도전할 때 이를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받아쳤다. 그는 처음부터 변호인들의 발언을 제지하고 퇴정을 명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정녕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맞서야 할 사법권 침해가 피고인들이나 변호인들의 공정한 재판 요구였을까? 항소심에서 김대중 후보는 “오늘의 여건 아래서는 재판부는 적지 않은 노력을 해왔다”고 치하했다. 2심의 경우 재판 자체는 비교적 공정히 진행되었지만 형량만 부분적으로 감경되었을 뿐이었고, 피고인들의 상고는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 6. 결어 명동사건 구국선언을 기점으로 정치계와 재야계가 손을 잡게 되었다. 일면식 없던 문익환과 김대중이 서로 알게 된 것도 이 사건을 통해서였다. 이 선언 참여자들이 구심점이 되어 반유신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주1) 김수환 추기경은 90년대 말 이후 햇볕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 이유 때문에 일각의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7,80년대 추기경이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뒷바라지한 것은 엄청난 공헌이다. 명동성당을 시위장소로 제공한 것 외에도 민주화운동 때문에 생계에 곤란을 맞은 수없는 가정을 돌본 것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숨은 공로는 그 공헌의 비밀스러운 성격 때문에 일일이 알아내기조차 어렵다. (주2) 함석헌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 역사학자, 신학자, 사상가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을 배웠으며 이 때 기독교를 접했다.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잡지를 발간했다가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다. 대형교회들이 군사정권에 협력할 때에 이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이를 비판했다. 재야의 큰 어른으로 오래도록 활동했다. (주3) 정일형은 2공화국의 외무장관이었다. 5.16쿠데타로 인해 장면내각이 실각한 뒤에는 야당의원으로 활약했다. 3.1민주구국 선언으로 인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이에 따라 아들인 정대철(5선 의원, 전 민주당 최고위원과 대표를 역임)이 정일형의 지역구에 출마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82년 작고하였다. (주4) 검사는 정치근이었다. 그는 5공 전두환 때에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주5) 함세웅은 가톨릭 신부이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창립한 진보 기독교 운동의 대부이다. (주6) 문동환은 개신교 목사이며, 문익환의 동생이다. 문익환/문동환/윤동주는 용정 출신으로서 절친이다. 61년부터 한신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며 현재는 미국 뉴저지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주7) 이문영은 학자이자 민주화 운동가이다. (주8) 서남동은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주9) 안병무는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안병무가 설립한 향린교회는 86년 항쟁 때에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주10) 윤반웅은 개신교 목사이다. 구국선언 전에 예배시간 도중 "박정희를 몰아내달라"는 기도를 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정작 3.1선언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윤반웅의 교회는 대형교회도 아닌 아주 작은 교회였는데 어떻게 이것까지 알고 구속했는지 의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박정희 "씨"라고 호칭한 것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주11) 문정현은 가톨릭 신부이며, 문규현 신부의 형이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당시 사형집행을 저지하려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노동운동에 투신하였으며,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서도 활동하였도 현재는 제주강정마을에서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 (주12) 이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이다. 법정에 올 때는 늘 한복소복을 입고 온 것으로 유명하다. 정일형이 남편이고 정대철이 장남이다. 남편인 정일형이 야당인사라는 이유로 판사에 임용받지 못했다. 호주제 폐지에 힘썼고, 3.1구국선언을 계기로 민주화운동 변호를 하기도 했다. 중매로 이희호를 만난 김대중은 이태영에게 충고를 구하고서 이태영이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결혼을 결심했다. 98년 작고했다. (주13) 이우정은 신학자, 인권운동가, 정치인이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을 폭로하였으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92년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주14) 이돈명 변호사는 인권변호계의 원로이다. 별명부터가 <인권변호사의 대부>. 홍성우, 황인철을 인권변호계로 입문시킨 이가 이돈명 변호사이다. 향후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 사마광은 저서 <간원제명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뒷날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낱낱이 손가락질하며 논할 것이다. 누구는 충성했다, 누구는 속였다, 누구는 곧았다, 누구는 굽었다(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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