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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주년 돌파. - 근현대사를 알아봅시다.
게시물ID : history_65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새누리매국노
추천 : 2
조회수 : 53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1/29 14:10:49

948년 문상길 중위 제주학살 &하느님의 법정 


5월 10일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미군정과 이승만 일파는 특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으로 무력을 증강합니다. 

부산항과 인천항에 미군함을 대기시켜 군함안에는 비행기 전차등의 기동부대를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완료합니다. 

수도 경찰 청장 장택상은 준 게엄령을 전국에 실시하고 대중집회 금지, 통행금지 실시 등의 비상조치를 합니다. 

특히 제주도는 더욱 강화된 조치가 취해져 비행기 해군등이 배치되는가 하면 5000명의 국방 경비대,3000명의 경찰 그리고 폭력 청년단을 동원하여 제주도 전 지역을 완전 봉쇄 해 버립니다. 

그러나 유격대의 투쟁은 더욱 과격해지고 일반 주민들 역시 적극적 호응하여 노동자는 파업을 단행하고 군정청 직원은 태업을, 학생들은 동맹 휴교를,일반 민중은 식량을 휴대하고 산으로 올라가 유격대원을 지원하는 등 반민족적 단독선거를 절대 반대합니다. 

결국 제주도의 5.10단독 선거는 유격대와 민중의 투쟁에 부딪쳐 파탄나며 미 군정장관은 어쩔 수 없이 3개 선거구 중 2개구는 무효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46년 입법의원선거시 육지는 좌익계가 선거에 불참한 반면 제주도는  좌익계가 투표에 참여해 모두 당선후 편파적이 편향된 입법의원이라고 곧바로 사퇴하고 제주도로 가버림)

제주도에서의 단독 선거 실패는 미국과 이승만의 민족 분단 음모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단독 정부의 정당성을 뿌리 채 흔들어 놓고 맙니다. 

5월 7일에서 10일까지 체포된 사람만 제주도에서 5만명이 넘을 정도이니 민중의 반발이 얼마나 거셌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미군정은 9연대장 김익렬을 해임하고 후임에 자신들의 하수인인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게 되며 미군정장관은 제주도를 고립시키기 위해 구축함 2척과 전투기의 출격을 요구하는 전문을 서울로 타진하게 됩니다. 

새로 임명된 박진경 중령은 5월 15일 연대를 새로이 편성하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토벌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유격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기 위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주민은 가축보다도 간단히 학살되고 섬은 붉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경찰들은 유격대의 공격으로 패퇴한 후 유격대가 이동하면 다시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유격대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걸어 무차별 학살하게 됩니다. 

그들은 학살한 시체를 토막 내 들판에 내어 버리는 가하면 국부까지 잘라내어 마을에 걸어놓고 유격대가 배출된 가족은 4촌까지 연좌 처형되었고 목에 돌을 달아 수장시켜 버리는 등 잔혹함을 드러냅니다. 

박진경은 진압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령으로 진급하게 되는데 6월18일 대령진급 축하 파티를 벌이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한 후 침대에서 사살된 채 발견됩니다. 

미군 방첩대가 암살사건을 수사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다가 모 하사관의 밀고에 의해 9연대 소속 문상길 중위와 그의 처,그리고 4명의 하사관의 거사임을 확인하고 그들을 서울로 압송해 2개월간의 고문과 수사로서 9월 23일 총살하게 됩니다. 

당시 2명의 총살현장을 끝까지 지켜본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22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이것은 절규도 아니며 호소도 아니다. 단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것일 뿐 이다. 

뒤이어 손하사관이 형장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하였다. 

집행장이 낭독하자 유언으로 “여러분, 훌륭한 한국 국민의 군대가 되어 주십시요.”라는 말을 남기는 순간,“겨누어 총!”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이때 손하사관의 입에서 “오오..삼천만 민족이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쏴!”하는 구령이 떨어졌다,...서울신문 1948.9.25> 



문상길 중위는'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1948년 9월 23일 오후 2시 경기도 수색 기지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는데

문상길과 사병 3명은 ' 우리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은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양양한 앞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처형은 정부수립 후 사형 집행 1호였다.

손선호(당시 22세)하사이며 이밖에 암살 공모자는 양회천 이등중사, 신상우 일등중사, 강자규 중사, 배경용 하사 등이었다. 건데 이들이 다 기독교인 이라네요

孫善鎬하사(22) 최후진술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연대장 김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가 하북이란 부락에 갔을 때 15세가량 되는 아이가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은 자세한 조사의 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도살하였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내했다가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사람이 한명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혀 없었다. 박대령을 암살하고 퇴장할 기회도 있었으나 3십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의 생명이 3십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민족을 위한 것인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文相吉(23)중위 申尙雨 1등상사(20) 孫善鎬하사(22) 裵敬用하사(19) 4명에 대하여 총살형을 언도하고 또한 梁會千 2등상사(25)에 무기 姜承珪 1등중사(22)에 5년징역을 언도하였다.

민간변호인 金養 변호사는 판결언도는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소감을 말하였다.

“금번 암살사건 관계자의 범행동기가 추호의 사심사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민족정기에 살고 죽고 하는 국방경비대 자체의 신조에서 우러나오는 애족적 신념의 소치라는 것은 피를 토하는 듯하는 피고 등의 진술로 명백하다. 왜 朴대령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든가 하는 것은 朴대령의 참모관으로서 증인 출두한 林富澤장교의 진술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朴대령 부임전 평화복구를 목적으로 도민을 선무하고 그들과 다정하여진 피고들은 다음과 같은 朴대령에 복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북조선을 위하여서는 30만 도민을 전부 희생시켜도 좋다. 그리고 ‘산사람’ 토벌을 주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각 부락을 수색하여서 부락민을 전부 검거하여라. 이때에 피하는 자가 세 번 정지명령에 불응하면 총살하여라’ 이상과 같은 朴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피고들은 민족을 위한 거사로 살해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정지명령에 불응한다고 총살당한 부락민이 전기 林장교의 기억에 남은 것만으로도 2·3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 군사상 희유의 대사건인 5.15사건 주모 군인에게도 사형이라는 판결은 없었다. 항차 조선민족끼리 애족 애국적 신념의 발로 결과가 이러한 사형으로 보상된다면 가혹하다

제주4,3은 남노당지령이 아닌 남한의 단정단선을 반대한 제주도민의 자발적의거 입니다
문상길도 김달삼의 동시의거를 반대합니다 상부지령이 없다고...
 
 친일파며 제주학살의 원흉 유석조병옥 현존 민좃당의 설립,창립자 자유선진당 조순형(총8선 민주당포함) 아버지
박지원님, 항일투사이며 정판사위폐사건 정판사장이었던 박낙종님이 할아버지 였다는군요 그사건으로
목포교도소 수감중 예비검속으로 사형당했다합니다

여순병란도 지창수등 애국장병의 자발적의거로 동지가 희생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지회,홍순석소위도 마지못해 참가한겁니다 주동자는 남노당원인건 맞습니다
서북청년단은 한참후 일입니다 서북청년단이 개입하므로써 사상논쟁 빨갱이타령이 시작됨
그전에는 김달삼과군인은 항상 휴전 적절한투항방식을 ㅤㅊㅏㅊ고 있었죠 ...

참고자료 “자료 대한민국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459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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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서.. 초라하게.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1948년 9월 23일 오후 2시 경기도 수색 기지 정부수립 후 사형 집행 1호

문상길중위가 민족에게 조국의군대에게 경찰에게 남기신말 ()_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를 적성지역으로 몰아 초토화 작전을 시도하려 했으나 
제주도 주둔 9연대장 김익렬 중령에 의해 거부된다. 

김익렬 중령(예비역중장)은 그의 유고 회고록에서 4.3 의 촉발이 좌익의 책동이 아닌 
경찰과 우익 단체들의 잔인한 진압작전과 학살행위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 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제주 4.3사건의 본질을 말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이야기

결국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무차별 진압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던 김익렬연대장을 해임시키고 박진경 중령을 후임으로 앉혔다. 

박진경은 일제 때 대판 외국어 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친은 친일파들의 정치 집단인 
대정익찬회의  중요간부였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올린다. 6월 중순이 되면 '포로' 의 숫자는 6천 명으로 불어난다.
 
제주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은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무장대의 숫자도 별로 없고 대부분 민간인이었던 이런 상황을 
미군정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전수행중인 지휘관의 보고도 무시하고 

강경진압을 위해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시켜버렸습니다. 
미군정에게 대한민국 국민은 죽여도 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제주 4.3사건을 좌익들의 무장봉기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논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말도 못하는 아기들이 좌익입니까? 
그들이 빨갱이입니까? 

제주 4.3 사건의 문제점은 좌익은커녕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하고 
순박한 양민들과 심지어 아이들과 여자들이 대거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점입니다. 

하사 손선호는 이렇게 말했다.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중략)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박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누군가 이미 사형당한 문상길에게 다가가 머리에 또 한발을 쏘았다. 
  미군사고문단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였다.

어떤이들은 그 시대를 자기의 출세와 양명을 위한 도구로만 삼았다. 

또 어떤이들은 대의와 시대의 모순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고통과 분노, 열정과 시대정신을 간직하고 산 사람들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투쟁이었다. 그 때도 지금도.

 

이데올로기는 그 불의와 부정의에 가담했던 자들이 떠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외친다. " 너, 좌파지? 너, 빨갱이지? "


그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들의 친일행적과 치부와 초라한 영혼이 

감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서.. 초라하게.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71109


<,미 군사고문단 제임스 하우스만 잘 기억해 두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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