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정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을 세우고 그 잣대로 많은것을 보며 느껴야 한다.
한마디로 사고를 '한걸음' 더 확장하여 자아와 타인의 념을 공명시켜 너 넓은 사고로 세상을 봐야한다는것. 이렇기에 정의는 희화화 될 수 없다. 희화화란 (풍자와 다르게 사용했습니다.)나보다 못한것에 웃고 남이 자신보다 못해지는것에 유쾌해지며 나의 우월성에 웃는것. 하지만 정의는 나 '만큼'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남의 고통에 슬퍼하며 남의 고난에 안타까워 하는 측은지심 또한 내가 그 남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
이러한 감정으로 수많은 사람을 이해하는 이해심 이것은 남을 낮춰 보며 자신이 높다고 여기게 만드는 희화화는 이해하지 못할정도의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바쁘고 고달프며 세상에 절여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희화화된 개체를 보며 즐긴다.
오히려 정의를 마주 보는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준다. 그래서 이 스트레스를 마주할 수 없는 사람은 정의를 논하기 힘들다.
수많은 자신의 고통과 책과 영화와 같은 미디어의 간접경험이 그 스트레스가 남의 고통을 덜 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통을 덜며 이것이 자신의 후의 고통을 덜 수 있다는것은 알려준다.
"왜 쓸데없이 정의를 찾는냐? 웃고 넘어가면 안되느냐?"
누가 이렇게 물으면 이렇게 답하면 된다 "나를 위해서 고통으로 내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