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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소설부문 - 봄날, 윤중로
게시물ID : readers_44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덤벼라오유야
추천 : 31
조회수 : 647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12/01 20:01:21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어쩌면 사람처럼 생긴 조그마한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수북이 쌓인 머리위의 눈을 보아하니 이렇게 함박눈이 내린다 해도 족히 30분은 넘게 서있었으리라. 그녀는 이 커다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7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그녀의 등만 보고도 그녀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기분 있지 않는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심장이 쿵소리내며 주저앉는 듯한 기분. 뽀드득거리는 눈길위로 그녀가 걸었을법한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인사하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긴 세월을 한 번에 건널 수 있는 인사말은 뭐가 있을까.

 

-남주야. 사실은 눈이 참 많이 내리네 라며 말하려 했다. 하지만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7년 동안 우연이라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그 사람은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눈빛이었다. -잘 지냈니. 그녀가 물었다. 물론 잘 지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작년에 사랑하는 배필을 만났고 토끼 같은 딸도 얻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만큼의 형편도 갖추고 있었다. -그럼, 너는? 내가 물었다. -응, 졸업하고 대전쪽 신문사에 취직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사실은 안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 말고도 더 알고 싶은 게, 묻고 싶은게 너무나 많았으니까. -근데, 너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10시가 되도 안오길래 잊은 줄 알았는데. 꽁꽁 둘러맨 그녀의 오트밀색 머플러가 눈바람에 흩날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있었다. -기억나니, 저기 뒤에 윤중로에서 벚꽃구경 하던 날.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눈 내리는 밤에도 생생히 기억나는 단내 나는 윤중로의 봄날을. -벌써 7년 전인 일인데 어떻게 기억해. 철컹철컹, 서강대교를 넘는 자동차들이 소음을 내며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너는 무슨 일 해? 그녀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물었다. -증권사에서 그냥 이런 저런 일 해. 그녀는 피식 웃었다. -뭐야, 나보다 먼저 입사해서 상사노릇 한다면서 무슨 증권이야. 그녀는 우스운 모양이었다. 하긴 학교를 다니며 그런 식으로 농담을 했던 기억이 스며들었다.

 

23살의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신문방송이라는 학과의 동기로 시작해, 친한 친구가 되었고, 연인이 되었으며, 헤어져 남이 되었다. 언제였을까, 늦은 밤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그녀를 불러내 캠퍼스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을 때였을까. 너무 겁이 난다고 고백했다. 너를 너무 사랑하는데 아까보다 지금 더 사랑하는데, 언젠가는 그 애정의 정점에서 마음의 그래프가 아주 미세한 조금이라도 내려온다면 그게 너무나 가슴 아플 것 같다고, 사랑하는데 그 마음이 예전같이 않을 때가 올까봐 두렵다고 한참을 넋두리했던 기억이 살아났다. 첫사랑이었다. 처음이라서 모든 게 서툴렀고 너무나 어렸었다. 아침에 보면 부끄럽던 연애편지를 주고받았고, 더운 여름이면 북한산을 올랐고, 겨울엔 버스타고 안면도로 놀러갔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가슴에서 아프게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결혼은 했니. 내심 물으면서 아니길 바랬다. 사연 많아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사랑받는 한남자의 아내의, 책임감 있는 어머니의 그것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별거다 물어본다는 듯이 눈을 흘긴 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첫눈은 함박눈이 오기 어렵다던데, 알고 있었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첫눈이란 기준은 뭘까 생각했다. 대관령에 내리는 11월의 눈일까 내 앞에서 내리는 눈일까. 어쩌면 같은 서울이라도 저기 멀리 수유리는 마른하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너 여의도에 눈 내리는지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는 그녀가 침묵했다. 그녀의 고향은 말씨가 느린 충청도의 어느 소도시였다. -일기예보 보고 오랜만에 서울구경이라도 할까 놀러온거야. 왜 그런 사람이 이제야 약속을 지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들은 검은 강물로 끊임없이 몸을 던지고 있었다. 강물은 흘러 서해로 나가 바다에 이르고 바다는 햇살에 자신의 몸을 태워 구름이 되 다시 눈으로 내린다. 어쩌면 눈은 영원한 것 들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 눈들은 너무 불쌍하지 않니, 백화점 앞에 내리는 눈들은 사람들이 좋아 할텐데. 여기는 그냥 사라질 뿐이잖아. 묻고 싶었다. 너가 말하는 그 백화점 앞의 눈들은 평생을 그곳에서 지낼 수 있는지. -왜 그 이후로 연락한번 없었니. 외투 안주머니의 휴대전화가 몸을 떨었다. 거래처 사람이거나 아내이리라 생각하며 무시했고 이윽고 전화는 끊어졌다. 20초가량의 진동이 끊길 때까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5월의 어느 언저리쯤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풍선과 콘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며 뛰어 다녔을 때였으니 어린이날일지도 모른다. 긴팔 셔츠를 입고 왔다가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그것을 벗어 허리춤에 묶은 그녀와 함께 윤중로 꽃길을 걸었다. 점심으로 내가 싸온 김밥을 먹고 하염없이 걷다가 폴라로이드 사진장수 아저씨에게 3장 산 사진들 중 두 장은 나눠 갖고 한 장은 우연히 얻은 실로 꿰어 벚나무의 키높이만한 가지에 걸어두었다. 비 내리면 어떡하냐고 묻는 그녀에게 그래도 추억은 번지지 않는다는 그런 삼류 연애소설 같은 말을 했던가. 길던 해도 노을이 지던 시간쯤에 그녀는 걷다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 헤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니길 바랬었다. 근래 들어 중간 중간 보이던 밝은 웃음 뒤의 숨길 수 없었던 어떤 슬픈 기운은 조금 예민한 나의 착각이길 바랬었다.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냐 물어볼 수 없었다. 목이 메어와 굵은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시니? 삼일절에 뵈었던 그녀의 아버지의 굽은 등과 밭은 기침소리가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응. 그녀는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망울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떨궜다. 그해 겨울에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언제 다시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푸념도, 답을 얻고자하는 물음도 아니었다. 그저 이별이란 건 우리라는 세계에서는 없을 거라 믿었기에 그 의미가 너무나 아득해져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그녀라는 사람을 잊어야하는지. 태양의 逆光을 등지고 그녀의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아주었다. 그런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만 아마도 오누이라 생각했으리라. 나 역시도 그렇게 느꼈으니까. 마치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아주 어린 여동생을 달래는 듯한 마음이었으니까. 괜찮다는 내말에 그녀는 소리 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슴 어느 부분이 뜨겁게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못 볼 사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서럽게 우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마도 우리는 평생 만날 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 -5년, 5년 뒤에 결혼을 했건 안했건 첫눈 오는 날이면 서강대교 남단에서 만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뿐.

 

-그때 내가 그랬잖아, 5년 뒤에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이렇게 만나서 말하고 싶었어. 그뿐이야.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강북너머로 주황색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5년이 아니잖아. 5년 전에는 이렇게 나오지 않았잖아! 가녀란 그녀의 어깨가 휴대전화의 진동만큼이나 미세하게 떨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알아? 혹시나 오다가 사고라도 났나싶어 조마조마한 마음 알아? 그녀는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 안 왔더라면 나는 아마 평생 너의 첫눈 오는 밤을 뺏을 뻔했네. 사실 나,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곳에 왔어. 근데 다가갈 엄두가 안 났어. 다시 만나 사랑하기에는 내가 너무 가진 게 없잖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을 타면서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평생 그녀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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