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
얼마 전 산 얇은 회색코트하나 입고 출근했는데.
젠장, 오늘 이렇게 추워질거라고 아침에 틀어둔 라디오에서 말해주지 않았는데.
갑자기 눈은 왜오는거야? 하여튼 기상청이고 인터넷이고 믿을게 없어.
구시렁 대면서 소주한 병 사들고 집으로 가는, 달 뜬 겨울 밤.
그녀가 올해 첫 눈을 맞으며 내 집앞에 서있었다.
가로등도 몇 개 없는 이 동네에서
게다가 10시가 넘은 이 시간에
이런데에 서있을만한 여자가 아닌데.
대체 저 여자는 또 왜 여기에 와있는가.
대체 저 여자는.. 사흘 밤낮 잠도 못 잔 얼굴로 바들바들 떨면서 누가봐도 야윈 몸을 해가지고도.왜 저렇게 빛나는 걸까.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는 빛.
너무 밝아서 곁에 있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빛.
우리는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안녕? 나도 1학년인데. 너도 오늘 입학하는거 맞지? 반가워-
10년도 더 된 우리의 첫만남을 난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아침, 아마도 꽃샘추위가 심한 초봄의 어느 날이었는데
새벽부터 엄마에게 상처가 남지 않는 연고와 밴드 같은 걸 겨우 구해 사다주고
학교고 뭐고 난 그런데 안 간다고, 그냥 엄마랑 있겠다고, 엄마를 지켜줄거라고 떼쓰는 나를 엄마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내 등을 떠밀었었다.
학교는 가야지.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 엄마는 우리아들 고등학교 졸업장 보는게 소원인걸.
엄마의 그 한마디에 옆 집 형이 물려준 교복을 겨우 챙겨 입고 학교로 향했다.
내가 3년 동안 이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그녀의 소원이라는 졸업장을 안겨줄 수 있을까.
너무 일찍 도착해버린 학교.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 켠의 벤치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앞에 거짓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너도 너무 빨리왔구나? 나도- 우리 아빠가 너무 보채서 말이야. 넌 이름이 뭐야? 난 한연수. 우리 친구할래?
연수. 한연수. 내 구질구질한 인생의 한 줄기 빛을 안겨주는 순간.
연수는 내게 와줬다.
콰광쾅쾅-
돈이 없어서 밖에서 친구들에게 밥 한 번 못 산다며 엄마를 들들 볶아대던 저 사람은 어디서 술은 저렇게 사먹고 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안 되는 세간마저 다 던지고 부쉈으면 됐지. 그 불쌍한 여인은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는걸까.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 나약해서 저 여인은커녕 내 몸 하나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걸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의 어느 겨울, 난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갔고,
날 바라보는 위치에서 바닥에 웅크려 있던 그녀의 눈을 읽어버렸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그래도 네 아버지라고. 네가 그래버리면 엄마는 살 수가 없다고.
하루 걸러 치르던 그 신성한 의식같은- 개같은 행사를 난 항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고,
미칠 듯이 답답한 가슴으로 겨울 밤을 가르며 도착한 그 곳에는 항상 그 아이가 있었다.
지금처럼 저 혼자 선녀같은 모습을 해서 말이다.
정훈아, 오늘은 나 이거 가르쳐줘. 오늘 수업시간에 들었는데도 잘 모르겠더라구.
누구보다 모범적이고 착하고 성실해서 학교 선생님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우리 연수는 내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다.
내 눈이 조금 부어있을 때도, 광대뼈에 연하게 멍이 들어있을 때도, 가끔 다리를 절뚝이며 나타났을때도, 한 번도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던 너무 어른스러운 그 아이.
지금의 너는 온 세상을 다 비출 것 같은 아름다운 웃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과 남 부러울거 하나 없는 환경에서
내 손이 차마 닿을 수 없는 그 곳에서 살고 있잖아.
대체.
왜 또 여기에 있는 거니.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멍하니 멈추어선 나는 그녀를 보고 있고,
그녀도 나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