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시린 손을 연신 비비며, 그 작고 보드라운 입술로 입김을 분다. 커트친 단발 머리에, 베이지색 코트와 붉은 목도리, 그런 중무장을 하고도
추위에는 어쩔 수 없는지 양 볼에는 붉은 꽃이 소담히 피어올라 있다. 그 언젠가 만났던 소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가 사랑하고 싶어했고,사랑했고,사랑했던 그녀가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여기서 한 발자욱 내딛으면 다시는 돌아서지 못할 것이다. 다시 시작할까? 할 수 있을까? 그런 반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멀리 떠나게 된 것도 아니다. 성격차이, 그로 인해 식어버린 그의 마음.
그 뿐인 이야기다. 다시 사랑한다면, 다시 사랑한다 말하면 그 때의 그 마음이 돌아오지 않을까?
가슴 한 켠이 아릴 정도로 사랑했고, 그 추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겠지만, 이제는 미련만이 남았다.
헤어지고 나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스쳐 지나갈 미련만이 말이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은 시리도록 잘 알고 있다.
「왔어?」
고민하는 그를 발견한 그녀가 조심스레 다가온다.
「멋있게 하고 왔네, 평소에도 그렇게 좀 하고 다니지!」
멋쩍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그를 향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 역시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화장을 하고, 한껏 멋을 부리고 나왔다.
그가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고민하면서 느꼈을 복잡한 감정을 그녀도 느꼈을까. 마지막이니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마음과 함께
밀려오는 후회와 미련들. 저 문을 나서면 이제 돌아올 때는 전과 다를 것이라는 그 마음.
「밥... 먹으러 갈까?」
한껏 긴장한 마음에 억눌린 답답한 목소리가 나온다. 아직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들이 그의 마음을 옥죄어온다.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겠어? 그냥 좀 걷자」
너스레를 떨며 팔짱을 껴오는 그녀,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이별을 직감했는지 그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젖어있다.
고개를 숙인 채 팔짱을 낀 그녀의 곁에서 하늘을 보며 걷는다.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는 연인 사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 없이 걸으며 내뱉는 입김에 세월이 담기어 아롱진다. 즐거운 순간들, 설레었던 순간들,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던,
딱 그 추억의 무게만큼 그의 마음이 아프게 짓눌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멈추어 섰다.
「다리 아파? 어디 들어갈까?」
「......우리 안 헤어지면 안돼? 내가... 내가 잘할께! 응?」
힘없이 그의 소매를 쥔 손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그렇게 사랑했고, 사랑했던 그녀가 그의 앞에서 울고 있다. 나 좀 잡아달라고,
우리 다시 열심히 해보자고. 그가 사랑했던 그녀가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네가 아니면 안되는걸, 다른 좋은 사람 말고 네가 좋아」
그에 따라 그녀도 영화의 여주인공이 된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안겨오는 그녀. 한 가지 다른 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카메라가 꺼지면
다시 웃으며 수고하셨다 말하겠지만, 그들은 이제 남남이 된다. 때가 되면 그녀는 다시금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짓겠지만, 그 미소를 그가
다시 볼 수 있는 때는 없다. 전화번호 11자리만 지우면 남이 되어버리는, 그 생에에 누구보다도 가까웠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멀어지게 되는 그런 관계. 그제서야 깨닫는다.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듯, 끝나버린 그들의 마음도 다시 되돌릴 순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