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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소설) 살아간다는 것
게시물ID : readers_46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베레베
추천 : 0
조회수 : 1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1 22:39:37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부산은 원래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러했다. 언제부턴가 부산에서 눈이 오면 눈이라기보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슬러쉬같은 질척한 것이 내리곤 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머리에 쌓일정도로 눈이 오는건 희안한 일이었다.

내게서 10m정도 떨어져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는 여자는 무릎까지 오는 투피스 위로 새빨간 코트를 입고 흑단같은 까만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얘기해본적은 없지만 내 머리 속에선 꽤나 인상깊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이렇게 눈이 소복소복 쌓일때쯤엔 새빨간 코트를 입고 까만 생머리를 어깨까지 내린 저 여자가 꿈결같이 나타났었으니까...

처음 그녀를 보게 된 건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느날이었다. 그 날은 다른날보다 추워서 꽁꽁얼은 손을 움켜쥐며 집에 갔었다. 그런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멍하니 얼마간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 지겨워서 아파트 놀이터로 나갔었다. 그런데 그날 유독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없어 혼자 시무룩하게 그네만 끄덕거리고 있는데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놀이터 안 벤치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았다. 어린 눈에도 그녀는 마치 천사처럼 예뻐보였다. 나는 그네를 밀면서 혹시 내게 관심을 주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무심하게 그네를 탔었다. 하지만 그녀는 회색빛 하늘만 바라볼 뿐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임신을 하고 있으셨던 어머니는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병원으로 가게 되어 나를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어머니보다, 새로 생긴 동생보다 어쩐지 빨간 코트를 입은 그녀가 더 머리 속을 휘젓고 있었다.

두번째로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수능을 망치고 엉엉 울며 거리를 헤메는 도중이었다. 부모님은 학벌이 높은 편이었기에 자식들에게도 어느정도 학벌을 요구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부모님의 기대에 맞는 성적표를 가져올 수 없었던 나는 너무 창피하고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져 견딜수가 없었다. 실망과 분노로 굳은 얼굴을 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무작정 거리를 떠돈지 얼마나 지났을까, 울적한 내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큰 눈에 아이들은 신나게 동네를 뛰어다니며 소리질렀다. 나도 저런 걱정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다시 어린아이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데, 골목길에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빨간 모직 코트에 긴 생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자...

순식간에 7살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자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며 괜히 그네를 삐그덕거리며 요란하게 탔던 사실도...

그런데, 여자가 10여년의 세월동안 하나도 늙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 등 뒤에 소름이 쫘악 끼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어릴적 추억은 순식간에 호러무비 도입부가 되었고 나는 미친듯이 그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얘기는 나중에 대학에서, 직장에서 좋은 얘기거리가 될 수 있었다.

세번째로 그녀를 만난 건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 일어나고 나서였다.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는데,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다. 날 좋아한다는 것도 거짓말, 아픈 부모님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 평생 같이 하고 싶다는 것도 거짓말...
삼류신파극에서나 일어날 일이 나에게 일어나 있었다. 하루종일 현실감이 들지 않아 꿈을 꾸고 있는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굴을 할퀴는 강바람에도 아랑곳없이 강가에 앉아 허탈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몇시간이고 아무생각없이 있었던 거 같았다. 어둑어둑해져서 고가도로에 설치된 가로등만이 날 비추는 데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멍하니 앉아 강물에 떨어지는 눈송이나 구경하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있었다. 변함없이 새빨간 코트를 입고 날이 저물어 새카매진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

이번에는 그녀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까지 나지 않던 눈물이 나왔다. 다시 없을만큼 서럽게 눈물을 흘리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눈이 그쳐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어디론가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그녀를 만나게 된 건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였다. 셋이나 생긴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데 친한친구가 내게 빚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서줬더니 빚만 남긴 채 도망갔다. 빚도 갚아야했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야했다. 하루 24시간을 천금같이 아껴쓰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회사에서 챙길 수 있을만큼 야근수당을 받으려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틈틈히 시간이 나면 아이들과 부업을 해야했고 어떻게든 빚을 줄이려고 온갖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일주일이, 한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가슴속이 텅텅비어 양철로봇이 된 것처럼 삐그덩거리는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희끗희끗한 내 머리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눈은 안그래도 조용한 동네를 더 조용해 보이게 하고 있었다. 문득 애들 생각이 나 근처 슈퍼에 들러 한 손에 애들이 좋아하는 빵과 우유를 담은 비닐봉지 들고 다시 피곤한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그녀가 보였다.

새빨간 코트를 입은 긴 생머리의 그녀...

갑자기 가슴이 찌릿해지며 목이 메였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매달려 울고 싶었다. 아이처럼 엉엉울며 소리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어렵게 살던 시절은 끝나고 아이들은 놀랄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 나가서 이쁨받으며 살고 있다. 나 역시 빚을 다 갚고 조금 작지만 훈기가 도는 집을 사서 배우자와 노후를 잘 보내고 있다. 가끔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가끔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가끔 손주들이 놀러오면 허허거리며 용돈 줄 정도는 된다.

이제까지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이게 행복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녀에게 똑바로 걸어가 그녀의 옆에 섰다.

"눈이 많이 내리죠?"
내 말에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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