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이틀째 내리는 눈으로 거리는 새하얗게 물들었지만, 검게 차려입은 정장의 간결함은 예상외로 풍경과 어울렸다. 1주일 전부터, 똑같은 시간대에 그녀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의 은은함은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더욱 밝게 비추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 앞에 똑바로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년 째 입은 오래된 패딩에 다 헤진 운동화, 무엇 하나 그녀의 눈길을 끌 요소는 없었다. 이 거리에 나오기 전까지 그렇게도 연습했던 멘트도 새하얀 눈발에 휩싸여 땅으로 흩어졌다. 애꿏은 MP3의 볼륨만을 높였다. 노라 존스의 ‘Baby It’s cold outside’ 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와 그녀 사이에 흘러들어갔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공간을 거닐지만 같은 음악을 듣고 있진 않겠지. 지금 그녀의 장면 속에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까?
오늘도 그녀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폭설주의보는 해제되지 않고, 내 마음속의 불안감도 해제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와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담배만을 뻐끔뻐끔 피워대며 시간을 축냈다. 어느새부터인가 그녀에게 말을 걸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내 힘든 현실을 이 장면을 통해 위로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눈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만, 내 시선은 더욱 머나먼 곳에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사랑을 속삭이는 달콤한 로맨스 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눈꺼풀을 깜빡이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끝나고 나는 쓰디쓴 현실에 돌아와 외로움에 사무치겠지.
오늘도 눈을 맞으며 서있는 그녀에게 용기를 쥐어 짜내어 따뜻한 캔커피를 쥐어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어딘지 슬퍼보이는 미소는 그녀의 청초함을 더욱 부각시켜주었다. 인터넷에서 이럴 때 위로의 한마디라도 건내주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내 용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녀 앞에 서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얼어붙었다. 추위 탓이라며 애써 위로하며 발걸음을 뒤로 하였다. 영화에서 보면, 여주인공이 뒤돌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남주인공을 붙잡던데,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나 보다.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방금의 속편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안기고 사랑과 고통을 고백하지.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우리는 세상 무엇보다 따뜻한 입맞춤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슬퍼보이는 미소를 감출수가 없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꿈을 꾸었다. 어느새 눈은 그치고 거리에는 차가운 눈발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 흐드러졌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오렌지색 니트에 밝은 청치마를 입고 있었다. 슬퍼보이는 미소는 없어지고 봄을 기다리는 소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나 역시 영화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옷에 꽃다발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자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겼다. 우리는 행복했다. 영화가 아니라 삶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서로의 미래에 대한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었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게 일찍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눈발은 그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운명임을 느꼈다. 프로이트는 꿈에 대해 환상을 품지 말라 하였지만, 예지몽을 꾸었다며 밝게 웃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용기가 내 혈액에 파고들어 온몸에 치솟았다. 그녀 역시 검은 정장이 아니라 밝은 옷을 입고 나왔겠지. 어쩐지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동안 면접때 쓰려고 묵혀둔 정장을 꺼내 입었다. 좀 크긴 했지만, 차려입은 모양새를 보니 제법 괜찮았다. 미용실에 들려 머리도 하고 꽃다발도 샀다. 그녀가 오기 전보다 이른 시간에 우리의 장소에 나가 그녀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냄새가 날까봐 담배도 피지 않았다. 그녀가 올 시간이 다가왔다.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눈이 자동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대감에 벅찬 심장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저 멀리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렌지색 니트에 밝은 청색 치마, 불안감은 그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개선장군처럼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아..안녕하세요..”
“아.. 어제 캔커피 주신 분이죠. 고마워요. 덕분에 덜 추웠네요.”
슬퍼보이는 미소따윈 없었다. 그녀는 내 등장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녀도 내가 운명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 삼류 연애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오늘에서야 믿어졌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저기 여기 계시는거 자주 뵈었는데.. 누구 기다리셨나 봐요..”
“사실 작년에 죽은 남자친구가 이곳을 유난히 좋아했어요.. 매일 눈이 오면 이 거리 벤치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죠.. 이번주는 그를 기리는 제 나름의 제사였어요.”
이 장소는 내가 항상 담배를 태우며 시간을 보내던 장소였고, 나 역시 캔커피를 좋아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당장이라도 사랑을 고백하며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영화는 감정선을 더욱 이끌어가기 마련이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는 이제 그를 보내주려 한다며 밝게 웃었다. 그렇다. 그녀도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근데.. 오늘은 왠 꽃다발이세요?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드디어 그녀가 꽃다발의 정체를 눈치챘다. 아마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친구를 잊게 해줄 누군가가 왕자님처럼 등장하기를. 눈이 그치는 바로 오늘이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는 용기를 내어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항상 지켜봤습니다.. 제가 이젠 하늘에 계신 그 분 대신이 될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제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녀는 눈물을 닭똥같이 흘리며 나를 바라보겠지.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면 영화는 막을 내리고 삶이 시작된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얼굴이 오만상으로 일그러지는 그녀만이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 죄송해요.. 저 사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정말 죄송해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건 아니다. 그녀는 대본을 잘못 읽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내 마음에 화답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자리를 떠났다. 방금전까지 가슴에 차오르던 기대감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꽃다발을 바닥에 팽개치고 담배를 물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 한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감독이 보여준 콘티와는 다르게 일찍 나가 그녀를 기다린 것이 문제였을까? 콘티에서는 분명 그녀가 나에게 안기는 것이 영화의 끝이었다. 아니다. 이것이 영화의 끝인지도 모른다. 대본을 잘못 읽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결국, 오늘도 안생기는 것이다.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도 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조그만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는 또다시 눈으로 뒤덮이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생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