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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시계
게시물ID : readers_47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루베리블
추천 : 0
조회수 : 21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02:27:49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딱히 눈이 좋아서 하릴없이 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맹하니 서 있던 그녀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마치 목적지 없는 사람처럼 길이 있기에 따라가는 것처럼 걸어가는 그녀였지만, 그녀가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주공아파트인 자신의 집이었다.

달칵하고 문을 열자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지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보일러를 키고,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면서 티비를 켰다.

째깍-째깍-째깍-

아직 평일 낮시간이라서 그런지 티비프로그램은 지루했고, 케이블방송도 재방송만 틀었다. 그런 티비를 한 채널에 고정시켜놓고선 그녀는 계속 술을 마셨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서서는 냉장고에서 심심한 안주거리를 가져와서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녀는 계속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착잡하고 짜증이 나서 마셨다면, 지금은 자꾸 생각이 나는 잡생각들을 잊기 위해서였다.

째깍..-..-째깍-

그녀가 마음이 착잡했던 이유는, 회사에서 짤렸기 때문이다. 성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열심히 하였고 능력이 있었지만, 회사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명단에 올라 해고당했다. 그녀도, 그의 직장동료들도 그녀가 해고당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동료들도 그녀처럼 영문도 모른채 직장을 떠났으니까.

빌어먹을 것들, 자신의 돈은 챙길여력이 있으면서 재정이 어려운게 말이되냐.’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한잔 더 술을 들이켰다. 고달플 때 먹는 술은 달다고 하던가- 그녀는 웃으면서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 ....-...-

회사일을 곱씹어보다 티비가 시끄러워 바라보니 연예인 가족들이 나와 서로 얘기하는 예능프로그램이 재방송 되고 있었다.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한 연예인의 딸을 보니 문득 그녀도 자신의 딸이 생각났다.

엄마- 엄마- 하면서 자신을 따르던 딸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딸을 볼 수 없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거다. 내가 낳은 아이기에 엄마로써 보고싶은 것은 당연하지만 아이를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또 아이의 아빠를 위해서도 만나는건 좋지않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자신의 딸의 사진을 찾아보려 했지만, 자신이 직접 버렸다는 것을 생각하고 다시 술을 마셨다. 이제 자신이 딸을 볼 수 있는건 오직 꿈일 뿐일 것이다.

...-.....-...-

근심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건만, 그녀는 왜 그녀를 짓눌르던 근심들이 자꾸 생각나는지 몰랐다. 술 때문이야- 혼잣말로 투덜거리던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고 정리한 뒤 침대로 가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 ...-

평소 시끄럽게 들리던 시계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나?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잠시 눈을 떴던 것을 다시 감았다.

...- ...- ...-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시계가 멈췄을 뿐이었다. 시계 안의 건전지가 제 수명을 다하여 멈춘 것 뿐인데 그녀는 시계가 멈춘 것이 왠지 자신의 모습 같아서 슬펐다. 일을 하던 그녀가 일을 못하게 돼서 그런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딸을 못보게 된 것이 자신의 모습 같아 슬픈걸까.....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냥 눈을감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집안은 어두웠다. 얼마 안 잔건가? 하고 불을 키고 시계를 봤는데, 시계는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 시계 고장났었지- 하고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전 11..아무래도 이렇게 어두운건 눈이 지독하게도 많이 오고 있나 보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릴거라던데..라고 생각하며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집에 먹을거라곤 라면밖에 없어 숙취해소 같은건 할 수 없었다. 라면을 가지고 티비앞으로 가 티비를 보며 라면을 먹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재미있는건 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그녀는 할 게 없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회사일이 바빠 조금이라도 할 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은 움직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누웠다. 일단 이 자유를 만끽하자면서 말이다.

이렇게 이틀, 사흘, ....아마 일주일이 지났을 것이다.

눈은 그쳤고, 술병은 여러병이 비워져 있었고 빈 라면봉지도 수북이 쌓였다. 시계도 당연히 멈춰있었고...아마 그녀는 일주일동안 집밖을 나간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잠시라도 나가야 했다. 왜냐하면 이제 집에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가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 귀찮은 듯 생각만 한 채 이불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누워있었다. 그러다 가기로 결심한 듯 몸을 일으키며 나갈 준비를 했다.

눈은 그쳤지만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고, 도로는 녹다 얼다를 반복한 듯 사방이 빙판길이었다. 꽁꽁 싸맸지만, 추운 그녀는 재빨리 슈퍼로 가 라면과 술, 그리고 시계에 넣을 건전지를 샀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벼룩신문을 한 부 가져왔다. 더 이상 빈둥거릴 필요는 없겠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신문을 펼치고 구인구직란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모아둔 돈은 몇 푼 되지도 않고, 이마저도 얼마 안가 생활비로 다 써질 거 같기 때문에 일단 그녀는 아무 일이나 하고 싶었다. 제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해도-.

며칠 더 빈둥거리다 그녀는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접시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쉬는 날은 없었다.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와 잠을 자고 다시 새벽에 나갔다. 월급도 불평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많이 고단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잘하는, 원하는 일이 아니라 그런지 피로는 갈수록 누적되어갔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아등바등 거리며 살 바에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보고 죽자고.

먼저 그녀는 자신의 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았다. 잘지냈냐는 안부와 함께 그녀는 자신의 딸 아이를 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잠시 긴 침묵이 이어진 뒤, 그는 생각을 좀 한 후 다시 연락을 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조금의 희망이라도 생긴 그녀는 기뻤다.

아이와의 재회를 상상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그녀가 일하는 식당에서였다. 식당주인은 화를 내며 왜 안오냐고 아우성이었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그리고서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아마 지금은 화를 내시지만 인정이 많으신 분이니 이해해 주실거야-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딸아이와의 재회를 생각해보았다.

시계는 1년전, 1주일동안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멈추고 난 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녀도 아마 모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중에 이 시계는 누가 봐도 알아차릴만큼 느려지고 또 1년전처럼 멈추게 될 것이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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