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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빨간 목도리와 흰 눈
게시물ID : readers_47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하
추천 : 3
조회수 : 2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03:12:35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까만 코트 위로 다소곳이 쌓이는 흰 눈. 그녀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손이 시린지 입김을 호호 불어가면서. 늘 그렇듯이 퇴근길의 지하철은 마치 뭉게구름처럼 사람들을 토해냈다.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의 옷을 꼭 여맨채,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버스로, 누군가는 도보로, 또 어떤 누군가는 택시로. 그녀는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했다. 빨간 벙어리장갑을 꼭 끼고 눈위에 올려 두리번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 나이에 아직도 저렇게 순수한 사람이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했다. 꼭 그 정도로, 어깨에 묻은만큼의 순수함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능청맞게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멀리서부터 손을 휘적거리며 능청스럽게 웃는 눈웃음을 하고 있는 그 남자. 그녀의 볼이 한껏 부풀어 오른 것으로 봐서는 아마 남자가 잘못을 한 것 같았다. 한 손에는 봉투를 쥐고, 한손은 멀리서 흔들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빨간 벙어리가 자리잡고 있다.

 "히히히, 늦었다."

 "웃으면서 넘어갈 일이 아닐거 같은데? 그치 이시안씨?"

 약속에 늦었는 듯, 남자는 아주 조금의 사과를 하고, 아주 뻔뻔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밉지만, 미운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여서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귀에서 반짝거리는 귀고리가 그의 장난기를 좀 더 빛내주었다. 눈은 조금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해 벌써 그녀의 어깨를 소복히 덮어 주었다. 남자, 그러니까 이시안은 허리를 여자의 앞에 멈춰서 이내 허리를 약간 숙였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여자의 손은 그의 볼을 주욱 늘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소현인것 같았다. 시안이 그녀에게 벌을 받으면서 '자흘 모해서히어 소히언 느으나아아아.'와 같이 말을 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아마 하루 이틀은 아닌듯, 능숙했다. 그렇지만 진심이 담긴 미움은 아니었던것 같다. 꼬집는 소현의 표정에서도 미소는 떠나가지 않았기에.

 "영화표가 몇 시지 시안아?"

 "일곱시?"
 "그럼 지금 몇 시?"

 "여섯시 사십분?"

 "밥은 먹을 수 있을까?"

 "팝콘을 먹어야하지 않을까?"

 시안은 말꼬리를 계속해서 올렸다. 능글거리는 그 미소와 같이 입꼬리도 함께 올렸다. 그리고 소현은 시안의 마지막 대답이 지나가자마자 시안의 볼에서 놓았던 뺨을 다시 움켜잡고 힘껏 올렸다.

 "누나는 팝콘 싫다고! 밥이 먹고 싶다고! 점심도 굶었다고! 춥다고! 찌개 먹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해!"

 위아래로 흔들흔들거리며 시안은 뭔가 이야기 하고 싶은듯 봉투를 흔들어보지만 소현에게 자비는 없었다. 아마 둘만의 방식인지 소현의 일방적인 투덜거림ㅡ배가 고프다, 한식이 먹고 싶다, 춥다, 짜증난다, 너 미워, 사장님 입금 좀 해주세요.ㅡ을 시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받아주었다. 마침내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뺨에서 손을 내려놓자, 시안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어깨에 묻은 눈을 톡톡하며 털어주었다.

 "시안아? 지금 누나 때린거야?"

 "음 글쎼? 눈이 쌓여서 털어준거 같은데 눈사람님?"

 "그으래? 그런거 치고는 감정이 조금 실린거 같았는데?"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한 순간도 지지않고 말대답을 하며 혀를 주욱 내미는 시안을 보고 소현은 '그래 니가 이겼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시안에게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에 늦는게 걱정되는지 발걸음도 조금 빨라 보였다. 그러자 시안은 종이봉투에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그녀의 맞바로 뒤에 섰다.

 "또 지난번처럼 목 사이에 눈 넣으면 다음에 커피 마실때 무조건 아메리카노로 주문할거야."

 "윽, 들켰다."

 그런말을 하면서도 시안은 눈을 움켜쥐지 않았다. 그의 손에 덜렁거리는 것은 제법 긴 길이의 빨간 목도리였다. 돌돌돌 예쁘게 말린 그것을 시안은 조심스레 펴 그녀의 한 쪽 어깨에 올리었다.

 "뭐, 뭐하는거야?"

 "가만히 있어봐."

 그런 다음 그는 그녀의 나란히에 서서 목도리를 일자로 펴서, 마침내 두 사람이 한 목도리 안에 들어오는 모습까지 둘러내었다. 그러기엔 조금 짧아서 시안이 한 손으로 끝자락을 꼭 잡고 있긴해야했지만, 어쨌든 시안의 목적은 달성된 것 같았다.

 "지난번에 부러워했던거 같아서, 깜짝 선물. 늦은 거에 대한 사과는 이정도면 충분할까?"

 "음, 짧으니까 불합격! 마끼아또 한 잔도 얹어줘, 된장찌개랑."

 "짧은건 생각보다 누나 어깨가 넓어서 그런건데."

 "너어!"

 하면서 소현은 목도리 안에서 바둥거렸지만, 시안이 그녀를 꼭 안고 있어서 소용 없는 헛고생이 되어버렸다. 결국 알았다는 듯이 그녀는 걸었다. 그와 한발짝, 한발짝 씩 함께 나아갔다. 흰 눈은 조금 풀어진 것 같다. 그녀의 어깨에 쌓이었던 눈은 흩어졌고, 그와 그녀가 나아가는 뒤로는 예쁜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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