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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 - 크리스마스
게시물ID : readers_47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로라
추천 : 1
조회수 : 19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03:35:50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오, 아름다워라!"

희뿌연 빛이 새는 가로등 밑입니다. 아까부터 한 남자가 그의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세워두곤 시를 읊습니다.

"...매서운 눈발 사이 홀로 서 있는 그대 곁에 내가 가리! 당신곁에 내가 있으리...!"

그의 낭독이 끝나자 한동안 정적이 흐릅니다. 눈 나리는 소리가 선명합니다.

한참의 고요함을 깨고,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오빠!" 하고는 와락, 그의 품에 안깁니다. 그도 그녀를 꼬옥 안았습니다.

저렇게 유치한 시에도 쉬이 감동 받는 탓에는 오늘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밤입니다. 까만 밤하늘 아래에서 하얀 눈이 내립니다. 더군다나 이도 저도 아니여서 찝찝하기만한 진눈깨비가 아니라, 펑펑 시원하게도 내리는 함박눈입니다.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구세군 종소리와 크리스마스 캐롤도 들립니다. 아파트 단지내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답시고 온 나무에 색색깔 꼬마 전구도 둘러놓았습니다. 보세요, 내 몸에도 은은한 노란 빛의 꼬마 전구가 둘러져 있지요. 내 몸에 두른 노란 전구빛과 점점 소복소복 쌓여가는 보드라운 흰 눈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기분이 더욱 좋습니다. 아이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한껏 신이 나 놀이터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어른들은 양손에 케이크 박스와 샴페인 한 병을 들고 들뜬 표정으로  아파트 현관키를 누릅니다. 몇 년을 이 아파트 화단에 서 있으며 매년 이 맘때 쯤 꼭 보는 풍경들입니다. 나는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이 날이 정말 좋습니다. 여기저기서 즐거운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실은 벌써 30분 전부터 내 눈을 사로잡는 꼬마가 있습니다. 까만 단발머리에 동글동글한 눈, 작고 귀여운 코, 새초롬한 입술, 빨간 털실 목도리, 꼬질꼬질한 오리털 코트, 그리고 귀엽게도 눈사람 장식이 붙은 벙어리 장갑. 예닐곱살 쯤의 작은 소녀가 벌써 30분이나 아파트 현관 계단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저런, 볼이 아주 꽁꽁 얼었네!'

볼 뿐이겠습니까. 장갑 낀 손에 호호 입김을 불고, 온몸을 오들오들 사시나무처럼 떠는 것을 보니 온 몸이 꽁꽁 얼었겠지요. 낼 아침에 끙끙 앓겠구나, 하는 측은함과 동시에, 이제서야 그 소녀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대체 저 어린 소녀는 무슨 이유로 모두가 행복한 이 날 밤, 혼자 오도카니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걸까요?

 

 하얀 눈송이들이 소녀의 머리카락에, 속눈썹에, 콧잔등에 사뿐 앉고는 곧 사르르 녹아 없어집니다. 미처 녹아 없어지지 못하고 가만히 쌓여가는 눈송이들을 소녀는 이따금씩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었습니다. 그러기를 40분쯤, 소녀는 놀이터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드디어 계단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습니다. 머리도 한번 더 크게 흔들었습니다. 이제 놀이터에 가서 친구들과 놀겠구나 싶었는데, 소녀는 놀이터 입구 근처에서 머뭇머뭇 거리더니, 끝내는 다시 계단으로 터덜터덜 걸어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소녀는 계단에 앉아, 쌓인 눈으로 발장난을 하더니, 곧 손으로 눈을 조물락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눈덩이를 뭉치고 뭉치어 이젠 굴려야 할 크기에 이르자, 소녀는 일어서서 눈덩이를 굴려 마침내 눈사람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얼어 붙은 소녀의 두 뺨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내 두리번 거리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척 떨리...려는 찰나!

'아얏!'

소녀가 내 잔가지 두 개를 뚝 부러뜨린 것입니다. 눈물이 찔끔 나올만큼 아팠지만, 소녀의 즐거워보이는 미소를 보니 그 아픔도 곧 잊혀졌습니다. 소녀는 내 가지를 들고 눈사람에게 쪼르르 달려가 팔 두개를 만들어 주고, 화단에 돌맹이를 주워 눈과 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만의 눈사람이 탄생하자, 소녀의 얼굴에는 지금 내리는 이 함박눈 만큼이나 큰 함박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반가워, 눈사람아! 너는 내 첫 번째 친구야!"

그리고는 눈사람의 손을 꼭 맞잡았습니다. 내가 직접 소녀의 손을 맞잡는 듯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야. 눈이 내리고, 여기저기 캐롤도 들리고, 예쁜 트리들도 있고..."

소녀가 눈사람과 마주보며 다정스레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내 첫 친구가 된 날이기도 하지!"

소녀는 눈사람과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등에 기대어 이야기 하고,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대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 켠이 아렸습니다.

"참! 너 춥지? 이것도 둘러."

소녀는 그녀의 빨간 털 목도리를 벗어 눈사람의 목에 둘러 주었습니다. 소녀는 뿌듯해하며, 한참 더 이야기를 하다가 눈사람에 기대어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저런! 집에 가야하는데...'하며 어쩔줄 몰랐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어머나!"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자가 달려와 소녀를  안아 올리며

"에구, 세상에..엄마 기다리다 잠이 들었구나... 얼른 들어가자."

하며 소녀를 안고, 한 손에는 케이크 박스를 들며 힘겹게 현관문키를 누르고 들어갔습니다.

 이제 밖에 남은 것은 아직까지 내리고 있는 함박눈과, 나와, 그리고 소녀의 눈사람 친구 뿐이었습니다. 나는 남겨진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소녀의 목도리를 감은 그 눈사람이 무척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그를 따라 미소지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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