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악몽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차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폭설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흐릿했지만. 난 그 흐릿한 인영이 그녀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많은 눈을 맞으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추운 곳에 오래 서있어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다고 생각됐다. 내 얼굴도 하얗게 질렸을까. 아니면 홍조를 띄고 있을까. 하얗게 질렸다면, 그건 추워서일까 아니면 그녀 때문일까.
“영우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추운 바람 때문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복수하러 왔어.”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
“....왜, 온거야.”
영우는 할 수 있는한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말했잖아. 복수하러 왔다고.”
“복수고 뭐고, 지금 우리 사이, 아니 지금 니 처지에 그런 말이 나와?”
“내 처지가 뭐?”
“......”
“복수하기 딱 좋은 처지라고 생각하는데? 나 무지 이뻐지지 않았어?”
“진짜 답없다, 너...”
“답 없는건 너야. 이 쓰레기 새끼야.”
그녀의 눈덩이 마냥 차가운 목소리가 영우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모든건 그의 잘못이었기에.
“악몽을 줄게. 널 사랑했던만큼, 너에게 깊은 악몽을 줄게, 영우야.”
-
그녀로써는 오랜만에 나가는 학교였다. 오랜만에 나갔음에도,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 이제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나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계속 빨게 변해가겠지.
“어...? 눈 엄청 내린다....”
한 여자 후배가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멍하게 말한다. 저 얘는 내가 있단걸, 알고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야, 갑자기 뜬금없긴한데, 갑자기 그 선배 생각난다.”
“누구?”
“성은설 선배…….”
“....그 영우오빠 전 여친? 그거 얘기하면 안 되는거 아니야?”
“뭔데? 나 그 둘 사이에 무슨 일 있단거만 알고 무슨일 인지는 몰라~”
금지사항이란걸 알면서도, 여 후배들은 목소리를 낮춰서 조잘조잘 얘기하기 시작한다.
“어....그 오빠가 워낙 유명한 카사노바였잖아. 그런데 성은설 선배랑 사귄거야. 그것도 진심으로....근데 그 언니는 오빠 전적이 워낙 화려하니까 조금 연애 자체가 사랑과 전쟁 느낌이었대. 연애라기 보다는 애증의 느낌이었다지...?”
“그러다가 한번 영우오빠가 옛날 버릇 못 고치고 놀아난 게 은설 선배한테 들켰지.”
“헐...진짜 사랑한거 맞긴 하대?”
그 악의없는 순수한 질문에, 은설은 더 이상 이어지는 얘기를 듣지않고, 그에게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헤어지자.”
“영우 오빠...대체 갑자기 왜...?”
“알잖아. 전 애인 못잊은거. 이젠 더 안되겠어.”
“....내가 돌봐준다 했잖아. 전 애인 몫만큼, 내가...!”
영우는 갑자기 눈앞에서 여자의 머리채가 잡히는걸 보고, 고개를 숙여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 뭐야!”
“꺼져.”
은설은 차갑게 여자에게 말을 내뱉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인사도 없이 도망갔다.
“현명하네. 여자관계 정리라니.”
“은설아...”
“영우야. 물어볼거 있어.”
영우는 말하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우리. 진짜 사랑했어?”
“......어.”
“앞으로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럴거야. 그러고 싶어. 영원히, 함께있고 싶어.”
“......대단하네......”
은설은 그제서야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너, 진짜 날 많이 사랑했구나.”
“...미안했다. 그 날 일은...”
그 날의 찰나의 실수가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영우가 평생동안 갇혀있어야할, 감옥을 만들었다.
“됐어...”
은설은 울고있었다. 울고 있을거라고 생각됐다.
“너. 나 안보이잖아.”
“......”
“그래도 감동이야. 목소리밖에 보이지 않는 귀신따위를, 계속 사랑해주겠다고 하니까.”
“......눈이 내릴때마다, 너가 생각나.”
“이제 생각하지마.”
“귀신은 자기가 죽은곳을 못 떠난다고 해서, 매일같이 그 사고현장도 가. 혹시 만날까봐.”
“이제 오지마.”
“매일 강의실에서, 너가 앉아있던 자리, 너가 웃고있던 자리...하나하나 훑어봐. 잊고싶지 않아서....”
은설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너가 그 여자와 함께 있지만 않았다면. 내가 그걸 보지만 않았다면. 그러고 나서 차에 치이지만 않았다면.
우린 지금,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일텐대.
“은설아. 안보여도 괜찮아. 그냥 여기 있어.”
“알았어....영원히 너와 있을게.”
바보같은 남자. 보이지도 않는 귀신이랑 영원히 함께 있겠다니.
“영원히 네 옆에 있을테니까....."
순간, 눈과 함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제 날 잊어.”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아니,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내 옆에 서있겠지. 내가 죽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