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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지하 계단 (길어서 ㅈㅅ)
게시물ID : readers_49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Brighten
추천 : 0
조회수 : 1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18:06:00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포근히 떨어지는 눈발 속에서 그녀의 환한 미소가 보였다. 입에 문 담배 한 개피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눈에 들어와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비비며 뒤돌아섰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겨울밤 번화가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히 보인다.

 

 

 그날도 나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석양이 내릴 즈음에 눈을 떴다. 전날 쓰러지듯 몸을 기대던 차가운 방바닥도, 테이프 자국이 얼룩덜룩 남아있는 작은 창문도, 그리고 창문 너머로 내리기 시작하는 어둠도 원망스러웠다. 저녁 6.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코트자락을 황급히 걸치고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안식처를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살고 있던 반지하 단칸방에서 버스를 타고 십여분쯤 가다보면, 휘황찬란한 번화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귀퉁이에 지하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하는 작은 술집이 있다. 바로 그 곳이 내 일터였다. 영하를 넘나드는 차가운 공기에 얼음장마냥 식어버린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있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려 바닥에 거의 닿아있다시피 한 열쇠구멍에 열쇠를 우겨넣었다.

 그곳에서의 일은 뻔하디 뻔했다. 제일 먼저 가게로 나와 문을 열고, 전날 내팽겨치고 갔던 테이블을 치운다. 그리고 흙먼지로 서걱거리는 감촉을 느끼며 바닥을 닦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속속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고, 비어있던 공간은 머지않아 술냄새와 고성으로 뒤덮이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나는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른 이의 비위를 맞춰가며 심부름을 했다.

 그날도 별다를 건 없었다. 나는 손때로 반질거리는 카운터에 기대어 피곤함에 뻐근한 몸을 주무르고 있었고, 머리 위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숫자를 확인하고는 걸어갔을 뿐이다. 경첩이 내는 삐걱거리는 마찰음을 들으며 문너머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자 어질지럽게 나뒹구는 빈 양주병이 보였다. 그리고 담배연기 너머로 쇼파 위로 몸을 반쯤 뉘인 또래의 청년이 보였다.

 

부르셨어요?” 나는 그 거만한 모습에 약간 빈정이 상했으나, 치고 올라오는 부아를 목구멍 속으로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 일로 와봐.” 그는 인상을 잔뜩 찌뿌린 채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아까 양주를 더 시켰었거든. 근데 시킨 지가 언젠데 왜 아직 안 갖고 와?”

,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청년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한시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등뒤로 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새끼야!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딜 쳐 나가? 이딴 일이나 하는 새끼가 건방지게 날 씹냐?”

 사실 나도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던 건 아니다. 남들보다 많이 가진 것도 없고, 남들보다 더 배운 것도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또래에게까지 괄시를 당하니 나도 모르게 억눌렀던 한숨이 터져나왔다.

하아.”

 그러자 등 뒤로 우당탕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나는 아차 싶어 뒤를 돌아봤고, 시야가 한번 번뜩하고는 다시 캄캄해졌다. 빈 양주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이마로부터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픔에 이마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몸뚱이 위로 사정없는 발길질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병원 침대 위에 있었다. 가게 주임으로부터 내가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켰다는 말과 더불어 가해자 쪽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라 합의금은 두둑하게 받을테니 고소할 생각은 접어두라는 말이 전해졌다. 그리고 더불어 더 이상 가게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말 또한 듣게 됐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깬 건 어두운 새벽이었다. 병실 안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조급한 고성과 병원 특유의 긴박감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귀찮게 여겨졌다. 나는 얇게 바스락거리기만 할 뿐, 전혀 포근하지 않은 이불을 한껏 끌어올려 귀를 틀어막고 잠에 빠졌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아침이 훨씬 지나서였다. 문득 간밤의 소란이 생각나 고개를 들고 옆자리를 확인했다. 침대 위에는 긴 머리의 여자가 창밖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나는 지난밤의 소란과는 대조되는 고요함에 피식거리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 웃음소리를 들어서인지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옮겨왔다. 나는 어색함을 느끼곤 어쩔 줄 몰라하다가 쭈뻣거리며 인사를 꺼냈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의외로 밝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천천히 뜯어보니 푸석거리기는 하지만 꽤나 예쁜 얼굴이었다.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후훗. . 반가워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 모습은 분명 어리숙하고 우스웠을 것이다. 그때의 그녀 역시도 웃음을 터뜨렸다. 단지 그것 뿐이었지만, 그것이 그녀와의 첫 기억이 되었다.

 

 나는 장장 한달동안이나 그곳에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와 가까워져 있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나보다 한두살 정도 많아보였고, 오랜기간 입원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서로 대화하는데 있어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좁은 병원안에 갖혀 지낸다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녀와 대화하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여태껏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디가 아픈지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때의 어두워진 표정뿐이다. 하지만 이따금씩 새벽에 고통에 가득찬 신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점과 그때마다 다급히 의사를 찾는 간호사들의 목소리로 미뤄봤을 때, 분명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밝은 얼굴의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퇴원하게 됐다. 난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저 오늘 퇴원해요.”

. 축하해요. 퇴원하시면 이제 뭐하세요?” 그러자 그녀 역시 밝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전 이제 다시 일자리를 구해봐야죠. 입원해 있는 동안 일하던 데서 잘렸거든요. 그쪽 퇴원하신 후에 뭐하세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살포시 미간을 모은 채 생각하는 모습에 귀엽다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쳐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참고 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만일 밖에 나가면 사람이 북적거리는 번화가 거리에서 함박눈을 잔뜩 맞아보고 싶어요.”

 나는 의외의 대답이 왠지 재밌고 우스웠다. 터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하하. 확실히 대답이 그 쪽 답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나는 미리 챙겨놓은 짐을 들고, 병실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움이 걸음을 붙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뒤로 우물쭈물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결국 마음의 허전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한마디를 건냈다.

조만간 놀러올게요. 눈 맞으러 같이 가요.”

 나는 쑥쓰러움에 그녀의 답변을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이후로 나는 한동안 거리를 헤매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면 맞을수록 지난 한달 간 마주하던 그녀의 웃음이 그리웠다. 하지만 떳떳한 일자리를 구해 그녀에게 당당히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쉴새없이 직장을 찾아다녔고, 정신없이 면접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나는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내가 머물던 병실로 달려갔다. 나는 잰걸음을 재촉해 그녀가 있을 병실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있어야할 침대 위는 텅하니 비어있었다.

 

 척추를 타고 불안감이 기어올라왔다. 마침 눈에 익은 간호사가 지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거칠게 그녀를 붙들고는 윽박지르듯 물었다.

여기 있던 여자 환자분 어디가셨어요?”

 일순 당황하던 간호사는 이내 날 알아봤는지 침착하게 말을 건내왔다. 그녀의 눈빛에서 안타까움을 읽었다.

그 환자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몸이 많이 안좋으셨거든요.”

 나는 그 말에 심장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사지에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나는 쓰러질 듯한 몸을 간신히 추슬러 병원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빛이 들지 않는 지하 술집 구석에 앉아 죽을 듯이 술을 마셨다.

 속이 메스꺼웠다. 구토가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번화가를 등지고 끊임없이 토해댔다. 더 이상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을 때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술기운에 흔들리는 거리에는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포근히 떨어지는 눈발 속에서 그녀의 환한 미소가 보였다. 입에 문 담배 한 개피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눈에 들어와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비비며 뒤돌아섰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겨울밤 번화가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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