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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운문 - 우산 속 빈자리
게시물ID : readers_50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휘모라디
추천 : 6
조회수 : 121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21:19:13

우산 속 빈자리 

 

글평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공기는 싸늘합니다. 당신은 지하철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봅니다. 누군가가 입에 문 담배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와 눈앞을 흐립니다. 찌푸린 얼굴들도 덩달아 흐릿해집니다. 흐릿해진 얼굴들은 지독한 담배연기마냥 씁쓸합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채 당신은 그저 지하철 입구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활짝 펴면 음산한 까마귀를 닮은 새까만 우산입니다. 당신은 우산을 펴들었습니다. 우산이 있음에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그 우산이 당신에게 너무 크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한 손에 든 우산을 빙빙 돌리며 우산살의 개수만 세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우산의 살은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인데도 아침부터 사람들은 부산하게 거리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오로지 당신만 이곳에 잡혀 있을 뿐입니다. 잠시 앉아 몸을 쉬고 싶어도 불친절한 거리에는 느긋한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우산의 넓은 품속에 몸을 집어넣습니다. 너무나도 넓어서 한 사람이 더 들어가도 될 만한 자리입니다. 무심코 쳐다본 그 빈 자리의 공백은 한 사람 분의 축축한 추억들이 쏟아져 내리는 곳입니다.


  지하철 무료신문에서 본 오늘의 운세에서 용띠의 연애운은 최상입니다. 다행입니다. 더 이상 우산이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열두 지지(地支)의 동물들과 음양오행의 조화로 예견한 당신의 운세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별자리 운세도 놀랍습니다. 처녀자리인 당신은 바로 오늘 운명의 상대와 마주칠 것이랍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까지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은 짐짓 기분 좋은 척을 하며 지하철역을 나섭니다. 하지만 행운을 상징하는 뿔 달린 말이 없는데 용이라고 있겠습니까. 별들 속에 진짜로 처녀가 숨어서 당신에게 운명의 상대를 점찍어 주겠습니까. 당신이 들고 있는 우산은 구멍이라도 난 모양인지 차가운 빗줄기가 새어들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마음의 빈 공간을 헛된 글줄기로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 지난한 글줄기가 비가 되어 떨어져 내립니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인파에 휩쓸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우산을 쓰고 계속 걸어갑니다. 빈자리의 싸늘함을 채워보고자 손잡이를 이리저리 바꿔 들어보지만 그래도 항상 반대편은 비어 있습니다. 당신만으로는 가득 차지 않는 커다란 우산을 홀로 쓰고 일요일의 부산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걷게 된 이 거리에는 잠시 주저앉아 사라져버린 발자국의 고동소리를 들을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아직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거리 위에서 당신은 방향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우산을 든 채 사람들을 따라 길거리를 헤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당신은 잠시 길거리에 멈춰서 그 사실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당신을 신경질적으로 지나치며 소근거립니다. 그 목소리가 꼭 당신을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의 빈 옆 자리를 되돌아볼 자격이 있습니다. 떠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까요. 또렷이 들려오는 빈자리의 메아리에 따라 울어 봐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아직 비를 피할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고 차가운 빗줄기에 몸을 맡기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비어버린 자리는 그런다고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반짝이던 거리 속에서 튀어 오르는 짭쪼름한 빗물을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맛에 중독되어 우산을 버리진 마시기 바랍니다. 빈자리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 당신은 빈자리에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산을 꽉 쥐고 계속 걸어가세요. 오늘의 운세는 정확하지 않을지 몰라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자리는 어느새 새로운 추억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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