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었다. 웃음이 많았던 그녀는 밝은 옷이 더 잘 어울렸다. 그래도 검은 옷을 입었다. 사방이 하얗게 덮인 그 곳에서 그녀는 혼자 검은 기둥처럼 서있었다. 그녀의 발치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허공 어딘가 한 곳에 오래오래 시선을 던지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상자를 보았다. 빨갛게 얼어 있는 맨 손으로 상자를 안아 올렸다. 뚜껑을 열었다. 하얗고, 아무 무늬도 없는, 둥그런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초점이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남은 뚜껑도 열었다. 눈발이 날렸다. 그녀의 손끝에서도 하얗게 날았다.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괜찮아요.’
처음 만나던 날 그녀는 그를 오래 기다리게 했다. 이 옷 저 옷 바꿔 입고 머리도 바꿔 만지다 그랬던가. 버스가 길에서 멈춰 섰었던가. 아무래도 좋다. 까페의 문이 열리고 울리는 종소리, 스웨터 차림의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단박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나중에 그녀에게 살짝 말했다. ‘너무 늦게 나와서 그냥 가려다가, 마침 들어온 네가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귀여워서 맘이 바뀌었어.’ 그는 그 말을 하며 하얗게 웃어보였었다. ‘급하게 달려와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그녀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상자 안으로 다시 손을 가져갔다.
‘영화 좋아하세요?’
‘남들 만큼은요.’
처음으로 영화를 본 날. 영화관에는 재미없는 영화밖에 걸려있지 않았다. 남들만큼 영화를 좋아한다던 그녀는 진지하게 영화를 골랐고, 그녀가 고른 영화는 슬펐다. 연인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중 하나가 불치병에 걸리는 이야기. 그녀는 영화 내내 울었고, 그는 그녀의 빨개진 코끝만 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는 그녀를 길거리에 세워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너무 잘 울어서요.’ 그녀는 손수건을 내미는 그의 손 위에 자기 손도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둘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그녀의 뺨 위로 새 눈물 자국 생겼다. 그녀는 눈물을 내버려 두고 상자 속으로 손을 넣었다.
‘생일날 뭐 하고 싶어?’
‘음... 여행!’
그와 처음 맞는 생일에 그녀는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가볍게 던진 말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녀의 생일날 둘은 새벽 기차를 타고 떠났다. 바닷가를 걷고 사진을 남겼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펜션이 있었다. 둘 만의 파티. 케이크와 촛불. 그리고 그의 품속은 따뜻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그녀의 얇은 옷가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바람결에 눈발을 실어 보냈다.
‘어, 지금. 그래, 그대로 있어 봐.’
‘또? 부끄럽다니까. 그럼 다 그리면 보여줘야 돼?’
그녀는 책을 좋아했다. 그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둘은 카페에 마주앉아 오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그는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노트에 그녀의 얼굴을 담은 페이지가 늘어갔다. 언젠가 그들이 함께한 기념일에, 그는 그림들을 묶어 그녀에게 선물했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 그녀가 모르는 그림이 있었다. 반지 케이스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 익살맞게 그려진 다이아몬드 반지. Will you marry me? 그는 그림 속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녀 앞에서 웃고 있었다.
상자 쪽과 허공을 번갈아 오가는 그녀의 손이 반짝였다. 흰 가루가 눈발 속에서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며 허공에 퍼졌다.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그는 내내 웃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모아 작게 치른 결혼식이었다. 신랑은 턱시도 대신 면바지와 셔츠에 보타이를 맸고, 신부는 웨딩드레스 대신 밑단이 풍성한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그녀가 던진 부케는 하늘 높이 날아 친구의 품으로 떨어졌다. 그는 웃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이때껏 봐왔던 그의 웃음 중 최고였다. 친구들이 뿌려주는 꽃잎을 맞으며, 그녀는 행복이 가득한 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었다.
문득 그녀는 살갗이 따가울 만큼의 추위를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하얗게 재가 되려면 얼마나 뜨거워야 할까. 그녀는 갑자기 날아든 생각에 몸을 떨며 상자 안으로 손을 넣었다. 한 번은 그의 미소가, 한 번은 그의 목소리가, 한 번은 그녀의 볼에 와닿던 그의 따뜻한 입술이 어디론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상자 속 하얀 도자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생명을 조금씩 날려 버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남은 그의 흔적을 조심스레 모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오목한 손안에서 아주 잠깐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곧, 바람에 조금씩 날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쥐었다.
이제는 텅 빈 상자를 그러안고 그녀는 한참을 서 있었다. 주먹을 꼭 쥔 채, 눈을 맞으며 그녀는 오래오래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