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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게시물ID : readers_51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인82
추천 : 0
조회수 : 20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23:36:01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기껏 용기를 내서 잡은 약속이건만 나는 잠시 망설이며 쉽게 그녀에게 다가가진 못했다. 그녀의 소식을 들었던 것은 고작 2주전의 일이었다.

 

뭐야 그게. 하나도 안 웃긴다. 근데 너 소식 들었냐?”

오랜만에 친한 학교 동기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 무슨 소식?”

지영이, 걔 이혼했대. 그렇게 끝낼 것을 왜 그렇게 난리를 치고 그랬대.”

그리고 순간 내 머리 속은 하얘졌다.

, 여보세요. 내 말 들리지 않냐? 여보세요.”

, 아니 잠깐 밖으로 나오는 길이라서. 그랬대? 이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더니. 내 주위에도 생겼구나.”

그게, 걔네 부모님이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살거든. 아파트 아주머니들 소식 빠른거 알아주잖냐. 나도 엄마한테 그 얘기 듣고 완전 벙쪘다니까.”

그러게 별일이 다 있네.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 나중에 또 통화하자.”

그래, 자식아. 연락 좀 하고 살자. ?”

전화를 끊고, 나는 회사 앞 홀리스커피 가게 앞에서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연기를 마시며 나의 이 감정은 무엇인지 나는 궁금해졌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내가 먼저였다. 학부제 보다 훨씬 큰 계열제를 도입한 앞서가는 우리 대학교에서는 1학년 때 OT를 가지 않으면 왕따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혼자서 학교식당 밥을 먹는 것은 당연해지고, 수업시간에 떠들 사람이 없으니 수업에 더 집중이 된다. 이렇게 되고 보니 2학년이 되어서 신문방송학과에 오게 되었을 때에, 정작 OT에 나가서 가전공을 신방과로 정하고 선배들과 놀러 다녔던 아이들은 성적이 되지 않아서 다들 신방과를 떨어져버렸다. 결국 멀뚱멀뚱 조용히 학교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던 아이들끼리 동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 너도 학교식당에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그리고 다같이 뻘쭘한 시간을 보내던 전공캠프 첫 날 분명히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저녁, 나다에서 히치콕 특별전이 있데. 수업끝나고 5시에 ㅇㅋ?]

학교 친구들이 으레 그렇듯이 어느 순간부터 나와 그녀는 묶이기 시작했고 또 어울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연극영화과 연출을 가고 싶었던 나와, 영화잡지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공통의 취미라는 아주 편리한 이유로 묶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흔히 일어나듯이 나는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흔히 일어나듯이 그녀는 나에 대해서 친구 이상의 감정은 가지지 않았던 것만 같다.

 

[내일 시간 되냐?] –

[흐음, 뭐 수업끝나면 어떻게든?] – 그녀

[그럼, 내일 7시에 역 앞에서] –

[아니, 뭔일인지나 얘기하지?] – 그녀

[서프라이즈한 재미가 없잖아?] –

[뭐 그건 그러네. 그럼, 늘 만나던 4번 출구에서] – 그녀

그리고 그 감정을 확인한 것은 내 나름의 고백을 준비했던 12월 아주 추운 날이었다. 기말고사가 그럭저럭 정리가 되고, 나의 마음과 감정에 대한 생각도 그런대로 정리가 되어 나는 그녀에게 나름의 어필을 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백이라면 역시 연말, 연말이라면 공연, 공연이라면 역시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걸쳐서 내가 찾은 결론은 김동률의 첫 콘서트였다. 소녀 같은 가사가 맘에 들지 않지만 목소리 때문에 도저히 듣지 않을 수가 없다고 몇 번이나 토로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내 머리 속에 남아있었다.

그 날도 아마 눈이 내렸던 것 같다. 우산을 펴고 눈을 피하고 있던 나에게 문자가 왔다.

[눈오는데 우산피는건 늙은이들이나 하는 짓]

그리고 문자를 보자마자 열심히 그녀를 찾아 나는 이리저리 둘러 보았지만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어이, 어디를 그렇게 열심히 둘러 보시나?”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여성스러운 차림이었다. 항상 보이쉬한 옷차림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잘 어울리는 중성적인 그녀였건만 그날 만은 달랐다. 크리스마스 느낌이 드는 빨간 원색의 코트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치마. 머리도 평소와 다르게 길게 풀고 나온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역시 그녀를 놓칠 수 없다고, 이대로 영원히 친구 구역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다시 결심했다.

그럼 함께 가시지요.”

아니, 어디를 가는데?”

, 그러니까 일단 따라와봐.”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우리는 함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 그나저나 너 어디 가는지 얘기하지 않은 건 참 잘한 일이다.”

?”

아니, 이렇게 이동할 줄 알았으면 당연히 나는 안간다고 했을껄.”

아니야. 너는 성격상 거절하지는 못했을 꺼야. 일단 만난다고 해놓고.”

막상 그날이 되면 몸이 슬슬 좋지 않아졌겠지.”

역시, 우리는 너무 오래 알고 지냈나 봐?”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며 콘서트장에 도착했고, 그 커다란 포스터 앞에서 환하게 짓던 미소를 나는 기억한다.

, , 정말. 정말 고맙다. 근데, 아니야 그래 이건 고맙게 받아야지. 고마워.”

뭔가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진심 기뻐하던 모습에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나 자신에게 감명했다. 그리고 느낌은 좋아지기만 했다. 그리고 듣는둥 마는둥 정신이 없이 공연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공연 내내 다시 한 번 정리했던 고백의 말을 조금 조용한 골목에 들어가서 읊었다. 표정이 묘했던 것이 기억난다. 기쁨과 망설임과 혼란스러움이 함께 했던 얼굴을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그리고 그 필요했던 시간이 다 지난 후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거절의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담배연기를 다시 한 번 깊게 빨아들이며 나는 여전히 나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본 그 놈의 건축학 개론때문인 것인지. ‘얘는 아닌가 보다란 기분으로 헤어진 전 여자친구 때문인지. 그냥 멍청한 연말 솔로의 판단력 저하인 것인지. 그래도 분명한 것은 궁금하다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나에게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좋은 핑계로 나는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던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색한 인사와, ‘너도 얘기를 들은 거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앞에서 나는 그냥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좋은 핑계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오늘 그녀가 입은 빨간 치마는 그 옛날 우물쭈물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지던 길을 찾던 그 날 저녁의 나와 그런 나에 대해 고민했던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계속 서 있다간 이런 저런 허튼 생각이 끊임 없이 솟아나올 것만 같아 머리 속을 떨쳐냈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서있는 그녀에게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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