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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게시물ID : readers_51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르멤피스
추천 : 4
조회수 : 17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23:59:17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이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

 

 심야 라디오에서 오늘 밤은 영하를 웃돈다고 떠들어댄다. 그래서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건가? 길거리에 차도, 사람도,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니만. 나는 횅한 길거리를 보자 갑자기 오한이 들어 히터를 더 빵빵하게 틀었다. [덜컹-] 갑자기 한 남자가 차문을 열고 들어왔다. 젠장. 밖의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 들어오자 오줌보까지 얼 지경이다. 뒷좌석에 앉아 느리게 문을 닫는 사람을 보니 사내놈이다. 생긴 건 멀쩡한데 이 추운 날 셔츠 바람이라니. 어딘가 이상한 놈을 태운 건 아닐까 싶어 내부 등을 틀고 물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

 싹퉁머리를 어디로 처먹었는지 놈은 고개를 숙인 체 대답하지 않았다. 하, 나 원참. 또 이상한 놈이 걸렸구나. 난 나오려던 한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저 손님, 어디로 모셔다드릴까요?

-잘…모르겠어요.

-예?

-지옥….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진짜로 미친놈이 걸렸구나. 어쩐지 김씨가 교대해달라고 하더니만. 어쩌면 실제로 있는 빌딩이나 건물일수도 있으니 나는 농담조로 대답했다.

-허허…. 그런 빌딩도 있답디까?

-…….

 사내놈은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봤다. 눈이 꼭 죽은 생선눈깔처럼 희멀건하고 생기가 없다. 이런 눈은 주로 한강다리에 기대 하염없이 강물을 보던 사람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눈이었다. 잘못하면 아주 좆된단 뜻이다. 나는 남자의 파리한 안색에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했다.

-거…. 젊은 양반이 그러면 안되지….

-…아저씨. 가족이 있으시네요.

 나는 남자의 질문에 백미러 아래 달려있던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마누라와 아들1, 아들2. 내가 택시에 하루 종일 앉아 일을 하는 이유들이 환히 웃으며 날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어요. 남자에게는 부모가 없었지만 사랑하던 여자는 있었죠.

-…….

 뚱딴지같은 소리였지만, 하루에 수 십 명, 백 명 태운 인생 경험으로 이럴 땐 조용히 있어야한다. 나는 잠자코 백미러를 통해 내게 말하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어요. 여자도 남자를 사랑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둘이서 가정을 꾸리자고 했죠. 그런데 여자가 안 된다고 한 거에요.

-….

 요즘 여자들이 어떤데 무턱대고 사랑만한다고 가정을 차린다 하겠누. 쯧쯧. 부모가 없어서 그런가? 인생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남자가 참 한심하단 마음이 들었어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분명 남자를 사랑한다고 그랬어요. 남자는 여자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고, 행복하게해줄 자신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유가 뭐냐고 물었죠. 여자는 안 된다고만 그랬어요. 그래서 남자는 홧김에 여자를 덮쳐서 임신시켰어요.

 얼레? 지금 이 놈이 스스로 강간범이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여자를 납치한 건가? 뭔가 이 추운 날 저렇게 옷 입은 것도 그렇고 뭔가 위험하다 생각이 들자, 나는 백미러로 남자의 동태를 지켜보며 조수석에 있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는 임신하고 난후에 남자랑 같이 살았어요. 남자는 행복했어요. 하지만 그건 남자만 그랬나 봐요. 여자가 얼마안가 자살했거든요.

 핸드폰으로 가려던 손이 멈췄다. 자살했다면 이야기 끝난 거 아닌가? 듣고 보니 남자는 여자랑 아기 둘 다 잃어버린 거잖아?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남자의 웅크린 어깨를 보니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몰려왔다. 나는 핸들에 올려둔 내 두툼한 왼손을 보다 다시 백미러를 보았다. 여자의 자살이야기를 끝으로 입을 다문 남자는 허망한 눈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 내가 남자에게 말했다.

-어…. 여자를 강간한 남자가 잘못 했네…. 그런데 말이야, 남자는 나중에 어떻게 됐는데?

-…지옥으로 가려고 해요.

 뭐? 그의 대답에 갑자기 울컥 뭔가 올라왔다. 나는 백미러를 통해 남자를 보며 말했다.

-어어. 그래…. 흣흠, 근데 그렇게 지옥 간다는 허풍 따위로는 죗값을 피하는 거로 밖에는 안 보이는데…. 그 남자가 스스로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숨죽이고 제 한 몸 희생해 가며 봉사하고 살아가야지…. 안 그래? 사실, 죽으면 다 끝이거든. 목숨으로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거 다 허풍이야. 피하는 거라고. 그런거 짐승도 그럴 수 있어. 인간이라면 악착같이 살아서, 진짜로 책임을 져야지…. 어? 거, 그 남자한테 이야기 전해줘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여자 등쳐먹고 죽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는 거 아주 안 좋은 거라고.

-…….

 남자는 내 말에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공포에 떠는 듯 한 눈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려나 보다 생각이 든다. 에휴. 딱한 놈. 내가 남자한테 말했다.

-손님, 집이 어디요? 내가 태워다 줄게.

-…고맙습니다.

-어어? 손님!

 [덜컹-] 남자는 들어왔던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찬바람이 한차례 택시 안에 휘몰아쳤다. 허, 오늘 일진 한번 사납네.

 

-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이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책망도 경멸도 담지 않은, 그저 슬픈 눈이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 사랑을 허락하지 않은 이 세상이 지옥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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