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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제] 산문 - 그녀가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게시물ID : readers_52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2OG
추천 : 2
조회수 : 20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3 00:47:21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의 기억이 벌써 1년 전 이야기라니. 맞는 말이다, 시간은 참 빨리도 흐른다는 말. 으레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며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이렇게 빨리 지나버린 시간이 새삼스럽고 놀라워,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문득 1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며칠이나 지나서였을까. 그녀는 내게 일본에 간다는 이야기를 한지 얼마되지 않아 내게 떠나기 전에 따로 잠깐만 보자는 말을 하였다. 여행이라고만 내게 말했었던 그녀였지만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안겨주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는 암시는 도처에 널려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녀는 은연 중에 내가 그녀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무언가 말을 해주길 바랬었던것은 아닐까?

 

-있지, 나 이번에 일본에 가.

 

엇갈린 시선으로 차마 나를 마주보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었던 그녀의 모습이 왜 이제서야 겨우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다만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그녀를 그렇게 홀로 외로이 떠나보내진 않았을텐데.

 

눈이 쌓여 하얗게 된 거리 위로 그녀의 눈물 방울들이 하나 둘 자욱을 아로 새기던 모습이 생각난다. 을지로에서 우리가 자주 다니던 카페 앞에서 만나, 그저 여행 잘 갔다오고 선물 사오는거 잊으면 안 된다고만 말하던 내 모습이 그녀는 얼마나 야속했을까 싶다. 맞잡은 두 손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 방울에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었지.

 

으르렁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며칠이나 서로 말 안하고 토라져있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나 마찬가지였고 그런 그녀도 나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 떠올려보면 우린 여타 다른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저기 놀러다니기도 잘 놀러다니고 서로 잘 웃고 잘 울고 잘 싸우고....... 가끔은 서로의 팔베개를 해주며 긴긴 수다로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날도 많았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우린 왜 그 와중에 서로가 품고 있었던 제일 중요한 말을 꺼내지 못했었던 것일까.

 

있을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엇나갈 대로 엇나간 내 사춘기의 방황이 끌고 온 잠시 동안의 방황일 뿐이라고. 다만 이 시기만 지나면 훗날 이 때를 돌아보며 참 철이 없었지하고 웃고 지나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눈에 담기는 모든 것에 흔들리고 자기 주관이 성립되는 과정 속, 사춘기 속에서 겪는 홍역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을지로 카페 앞에서 그녀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여행이 아님을 내게 마음 속으로 전달했었을 때, 그때서야 난 비로소 그것이 단순한 홍역이나 방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맞잡은 두 손 위로 뚝뚝 떨어진 눈물 방울을 조심스레 훔쳐내며 그녀는 내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얘기했다. 으레 우리가 서로에게 하던 가벼운 안녕과는 무게감부터 다른 그 마지막이란 단어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며칠 동안이나, 아, 아니면 몇년이나 걸려?

 

그때의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마지막이란 단어를 부정하는 대답을 듣고 싶어 했었다. 여기까지 와서야 겨우 내 마음이 단순한 방황이 아니란 것을 알게된 내 앞에서 마지막을 고하다니. 가슴을 움켜쥐고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는 이제 그걸 알고 있는데.

 

-있을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엇나가야 한다고 태초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면 우리와 같은 걸까?

 

-다 알고 있었어.

 

눈물이 차올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나는 겨우 그녀를 붙잡고자 팔을 뻗었다. 을지로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을 알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맞다, 아니다의 옳고 그름으로 내 감정에 대해 판단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으리으리한 수식어나 표현 따위 상관하지 말고 그저 솔직했어야 했는데. 며칠, 아니 몇시간 만이라도 내게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여행을 떠나기로 한 그녀는, 그날 이후로 내게서 떠나 영원히 사라졌다. 가슴에 품었던 마음은 서로에게 전달하지조차 못한 채.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우리의 마지막을 품고 눈은 오늘도 내렸다.

 

있었다.

엇갈림 속에서 결국엔 헤어지고 말아야 했던 우리가.

다른 친구들과 같지만, 다른 연인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음에 서로 다가가지 못했던 우리가.


눈을 맞으며 우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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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네요. 심사는 어차피 못들어갈 거 알지만, 한번 읽어보시라고 올려봅니다.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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