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마감시간 이전에 수신된 메일이 있어 대리 등록합니다. ( [email protected] 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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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분명 그녀는, 자신의 뒤에 놓인 의자에 앉지도 기대지도 않은 체, 서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두 다리는 벅차도록 하얀 바닥에 닿아 있었다. 하얀 것들이 내려왔다. 하늘로 올라간 그것들이 이 순간 돌아왔다. 어지럽게 흔들려온 그것들은 기억의 하늘을 건너와 지금 내 눈 앞에서, 그날의 땅에 떨어졌다. 고사리 같은 소녀의 발이 그 위를 살포시, 덮었다.
그날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이…이이이…”
바닥은 언제나 가까웠다. 어린 소녀의 눈에는 앉든 서든 기어 다니든 언제나 바닥은 자신이 속해있는 곳이었다. 그런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가르치려는 엄마가, 소녀로서는 이해가 안됐지만, 꼭 잡은 그 손만은 너무도 따뜻해서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하면 되는 거야.”
소녀의 작은 눈에는 땅 위로, 바위 위로, 벤치 위로 눈이 쌓여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의 눈에는 그것들이 그저 아름다웠다. 날짜조차 기억 못할 어느 겨울이, 소녀에겐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책상에 놓인, 눈 오는 날 엄마와 찍은 어릴적 사진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짜증이 밀려와 사진을 덮어버리고는 방을 나왔다.
“이 시간에 어디 가니?”
엄마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몰라도 돼.”
“저녁 먹고 나가지…”
엄마의 말은 듣지도 않고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바깥 공기는 맑았다. 겨울이라 춥지만 어쩐지 이 차가운 공기의 느낌이 싫지가 않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밤중에 여고생이 교복을 입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런 날에는 멍청한 남자애들 몇 명 불러서 어디든 시간이나 떼어다 들어가면 그만이다. 오늘은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포장마차로 향했다.
새벽의 집안 공기는 기분 나빴다. 새벽에 현관에 들어서면 신발이 하나도 없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 죽어버린 아버지의 신발은 원래 없고, 엄마는 새벽부터 일을 하러 나간다. 식탁에는 아직 따뜻한 아침상이 덮개에 덮인 체 차려져 있었다. 식탁에 놓인 쪽지를 읽어 보았다.
[우리 이쁜 딸, 술은 몸에 안 좋으니까 많이 먹지 말아라. 항상 건강 챙기고, 학교 갈 때 아침은 꼭 먹고 가렴. 사랑한다~ 아참, 오늘 눈 온다니까 우산 챙겨가렴]
쪽지를 다 읽고는 속이 뒤틀렸다. 심하게 구역질이 나 화장실에서 술을 모두 토했다. 변기를 잡고 욕을 퍼부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하아… 젠장, 엄마나 일 나가지 오늘은 일요일 이라고…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창밖엔 눈이 내렸다. 식탁을 보니 다시 짜증이 나, 밖으로 나갔다. 현관엔 우리 집엔 하나뿐인 우산이 있었다.
거리는 온통 하얗다. 눈은 계속 내렸고, 눈송이가 하나하나 달라붙을 때 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들은 자기들 끼리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횡단보도에 이르렀을 때, 건너편에서 엄마가 보였다. 칫… 내게 다가오는 엄마를 무시한 체 반대쪽에 이르렀다. 엄마는 횡단보도 중앙부터 내게 말을 걸며 따라왔다.
“친구들이니? 예쁘네. 왜 우산 안 가져 나왔어? 응? 밥은 먹었니?”
친구들이 쳐다볼 정도로 무시하며 지나쳐 갔는데도 엄마는 계속 말을 걸며 따라왔다. 한쪽 바구니에서 붕어빵을 꺼내더니 내게 주며 말을 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과 함께, 가슴속에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와 폭발해 버렸다. 그만 소리를 질렀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병원 천장은 하얗다. 눈을 뜨고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조금 오래 걸렸다. 몸을 일으켜 병원 침대에서 나오자 간호사가 와서 설명을 해줬다. 내 기억을 조합해 보면 나는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발작 증세를 보였고, 쇼크로 인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기억을 더듬자 문득 생각이나 고개를 돌려보니 옆 침대엔 엄마가 누워있었다.
“다행이 생명엔 지장이 없으셔요. 다만…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신경 손상으로 인해 아마 앞으로 걷기는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 별다른 절망도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좀 전의 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차도에 뛰어든 나를 엄마가 인도로 끌어냈다. 다행히 차는 피했는데,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뒤차는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엄마는 나를 감쌌다. 짧은 순간의 브레이크 소리와, 경적, 내가 지른 소리와 그 광경이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엄마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병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한참 후에 엄마가 깨어났을 때, 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일어나자마자 엄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 딸, 우리 딸은 괜찮나요?”
병원 밖은 아직 밝았다.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추운데도 몸이 뜨거웠다. 눈이 내리는 모습은 참 예뻤다. 다만 조금 흔들리고 흐렸다.
일주일 쯤 지났던 것 같다. 나는 문득 내방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위에 눕혀놓은 사진을 세웠다. 밖으로 나가자 휠체어를 탄 엄마가 보였다. 나는 말없이 엄마를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금씩… 조금씩 하면 되는 거야.”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엄마를 짊어지고 내가 걷듯이 했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엄마는 너무 가벼웠고, 작았고, 아기 같았다. 흐릿한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씽긋 웃으며 엄마를 바라봤다. 그런데 엄마는 내 얼굴을 닦으며 괜히 딴소리를 하셨다.
“어머 얘, 왜 우니?”
그날도 눈이 왔었다.
눈을 뜨자 차가운 공기가 날 감싸왔다. 긴 꿈에서 깨어난 듯 했다. 벤치에서 잠시 졸았던 모양이다. 무릎에 놓인 책이 보였다. 벌써 졸업 논문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문득 뿌듯함이 밀려왔다. 책 위로 눈이 떨어졌다. 눈이 오는 모양이다.
“엄마, 춥다. 들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멈춰버렸다.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분명, 서 있었다. 휠체어에 앉지도, 기대지도 않은 체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하늘을 보며 서 있었다. 하얀 눈이 마구 떨어졌다.
“어…엄마… 어떻게…”
엄마는 몇 걸음을 걸어 보았다. 어느새 쌓인 눈 때문에 발자국이 생겨났다. 나는 달려가서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았다.
“어…어…어떻게…”
“눈이 예쁘잖니…”
눈이 내려 볼에 닿았지만 볼은 뜨거워졌다. 오늘도 빌어먹을 눈은 흔들리고 흐렸다. 흐려져서 그런지 눈앞은 보이지 않고, 오래된 기억이 보였다. 그날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얀 눈은 땅 위로, 바위 위로, 벤치 위로 내리고 있었고,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서 비로소 걸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내딛을 수 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그날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