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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침묵하는 자가 많은 이유.
게시물ID : sisa_4043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엘케인82
추천 : 3
조회수 : 23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21 18:05:18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시민들은 정치적 이슈에 100% 매여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도화된 영역(정치/행정)이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게끔 하는 것이 현대 정치체제의 기본 발상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정치 구조에서는 전문화된 정치/행정 영역이 시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만큼 왜곡되어 작동하고 있고, 그래서 시민들이 해당 문제들을 ‘직접’ 해결하도록 떠맡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민들의 직접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민사회의 자체적 역량에 의존하는 사건이 너무 많아지면 과부하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정치적 피로감 내지 체념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근대 사회의 특징은 정치(행정) 또는 경제 영역이 자립적인 “체계”로 간주되는 데 있습니다. 각 영역들마다 복잡성이 크게 올라가는 바람에, 더 이상 과거 사회처럼 한 기관이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수령은 행정가이자 동시에 사법관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오늘날 복잡한 행정 및 법체계는 더 이상 '그런 양다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이 현실화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정치적 사안들 중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관련 지식들을 요구하기에, 이를 일반 시민들이 모두 이해하고 논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시민들은 자신의 생계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해당 영역에 거의 살다시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정말로 그러한 독자적 영역을 형성해 냈습니다. 이제 정치-행정의 문제는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영역에서 자립적으로 관리합니다. 시민들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들을 누가 다룰 것인지 결정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접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활동을 합니다. 캠페인을 벌인다든지, NGO를 만들어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손을 대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러한 직접적 활동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정치적-행정적-경제적-사법적 분야들이 모두 자립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런 자립화가 시민들에게 반드시 바람직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경제 체계는 오늘날 국경의 범위를 넘어서는 단일 시장을 촉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각지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정치나 행정, 사법체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 경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하거나, 사법부가 외압에 의해 독자성을 상실하는 등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사소한 것이라면 각 체계 안에서 자생적인 정화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혹은 관련된 여타의 체계들(예를 들어 법, 정치 등)로부터 도움을 받아 해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들이 정말로 심각한 상태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집니다. 도저히 체계 자체의 작동으로 문제 해결이 안 될 만큼 각 영역들이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체계 바깥의 시민들이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경우 4.19나 6월 항쟁은 시민들이 대대적인 직접 개입을 통해 정치적 체계의 왜곡(대선 부정, 군부 독재)을 해결해 낸 경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 및 사법 제도는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시민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수준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법체계가 재벌들에 과도하게 유착된 채 작동함으로써 중립성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재벌 총수가 탈세 혐의를 받더라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반대로 노동자들의 불법에 대해서는 대단히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등. 또는 4대강처럼 의혹이 많은 사업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점 등등. 노회찬 전 의원의 의원직 상실 판결도 어떤 면에서는 상식적인 판결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도 볼 수 있겠고요.

이와 같은 제도들의 왜곡된 작동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왜냐면 사법제도는 흔히 시민들에게 정의의 최종적인 보루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보루마저 중립적이지 못하다면 시민들은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요? 이제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여론을 조성하고 압력을 가함으로써 해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입니다. 당장 2000년대에만 해도 이런 사건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2002년의 미군 장갑차 사고 때 일어난 촛불시위, 2008년의 광우병 사태 당시의 촛불시위. 또 최근에는 한진중공업 파업 때 희망버스 운동, 혹은 남양유업 불매운동 등이 떠오르네요. 요즘은 국정원 대선개입 및 경찰의 수사축소/은폐/대선개입 의혹이 정치/법 차원에서 제대로 해결될 것 같지 않자, 시민단체들과 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지요.

혹자는 이런 상황들을 두고 ‘광장 민주주의’ 내지는 ‘거리 민주주의’라고도 일컫습니다만, 저는 이 일련의 상황이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정치 및 행정에 독자성을 부여했는데, 이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시민들이 다시 개입해야 한다? 애초에 왜 시민들이 정치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런 사안들을 일반 시민들이 직접 다루기에는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시민운동은 과부하에 걸린 것처럼 보입니다. 개입해야 할 사안이 너무 많은데 역량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시민들은 분노하다 못해 지쳐서 체념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할까요? 차라리 윤창중 사태처럼 잘못을 하더라도 정치 영역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다행입니다. 화는 나지만 우리가 더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회계조작을 통해 대량 정리해고를 감행한 쌍용자동차는? 2000일 넘게 투쟁중인 재능교육? 수십 명이 죽었는데 아무도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삼성반도체? 수십 조를 쏟아부은 4대강 사업? 국정원 대선개입? 남양유업? 우리는 이 모든 사안에 대해 모두 지식을 습득하고 분노할 여력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추상적으로 분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깨어있는 시민의 운동’에 기대는 문제 해결책은 매우 제한된 역량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제한적입니다. 2008년 촛불시위에 참여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지만, 제도권 바깥에서 시민들이 어떤 주장을 직접 제기하는 것은 사실 문제 해결의 효율성 측면에서만 보자면 투입된 역량에 비해 효율이 대단히 낮은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민들이 직접 나서기 위해서는 사안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려면 아무래도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모두가 공감가능한 최소한의 주제 범위(예를 들어 ‘인권’)만을 꺼낼 수 있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논쟁적이거나 이견의 여지가 존재하는 경우 직접적인 개입을 통한 해결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민들의 개입을 통한 문제 해결이 너무 자주 일어나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대단히 걱정스럽습니다. 당연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움직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 상황은 정말로 사회에 있어 ‘최후의 최후의 보루’(법이 ‘최후의 보루’라고 한다면)여야 하는데, 이것이 잦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법체계 혹은 입법부 등의 사회 제도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민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잦아지는 만큼, 시민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면서 시민들의 무력감과 피로감이 높아집니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그런 면에서 향후 5년간의 시민사회에 지울 수 없을 만큼의 무력감과 피로감을 안겨주었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민들의 ‘거리 민주주의’의 활성화는, 역으로 그만큼 자립화된 법체계나 정치체계의 작동에 중대한 이상이 생겼음을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ps.곧 있으면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영화가 개봉될겁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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