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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글인데 이거 좀 혼동되네요 이글 사실인가요????
게시물ID : sisa_2649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리,
추천 : 2/5
조회수 : 904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12/04 14:22:00

<1995년 12월 21일 - 5.18 특별법 제정>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이전

1945년 8월 15일 - 

1948년 7월 20일 - 


-이승만 정부(제1공화국)

1948년 8월 15일 - 

1948년 9월 9일 - 

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8일 -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사건 
1950년 8월 3일 - 다부동 전투
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28일 - 

1950년 10월 18일 - 

1950년 10월 25일 - 

1951년 1월 4일 - 

1952년 10월 6일 - 

1953년 7월 27일 - 

1960년 4월 19일 -


-장면/윤보선 정부(제2공화국)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혁명 


-박정희 임시군정

1963년 10월 15일 -  


-박정희 정부(제3공화국)

1966년 9월 22일 - 
1968년 1월 21일 -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김신조사건)
1971년 8월 23일 - 실미도사건 


-박정희 정부(유신/제4공화국)

1974년 8월 15일 -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1976년 8월 18일 -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최규하 정부/전두환 임시군정

1979년 12월 12일 - 12.12 사태

1980년 5월 15일 - 
1980년 5월 17일 - 
1980년 5월 18일 - 


-전두환 정부(제5공화국)

1983년 5월 5일 - 중국 민항기 불시착사건  
1983년 10월 9일 - 아웅 산 묘역 테러사건 
1987년 11월 29일 - 대한항공858편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 

1987년 6월 29일 -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선언)

1987년 10월 27일 - 대한민국 제9차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투표 

1987년 12월 16일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 노태우 정부(제6공화국)

1988년 2월 25일 - 노태우 정부 출범

1988년 7월 7일 -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7.7선언) 

1988년 9월 17일 - 서울올림픽 개최 

1988년 11월 3일 - 제5공화국 청문회

1989년 2월 1일 - 대한민국-헝가리 수교

1990년 9월 30일 - 

1991년 9월 18일 - 남북한 동시유엔(UN)가입 

1991년 12월 31일 -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2년 8월 23일 - 

1992년 8월 24일 - 

1992년 12월 18일 - 


-김영삼 정부(문민 정부)

1993년 2월 25일 - 

1993년 3월 12일 - 제1차 북핵위기

1994년 7월 8일 - 김성주(김일성) 사망 

1995년 10월 19일 - 노태우 前 대통령 비자금사건

1995년 12월 21일 -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 제정

1997년 2월 12일 -

1997년 2월 15일 - 

1997년 12월 18일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1998년 2월 25일 - 김대중 정부 출범 

1999년 6월 15일 - 제1차연평해전(제1차서해교전) 

2000년 6월 15일 - 김대중-김정일 회담(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2년 6월 13일 -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 

2002년 6월 29일 - 제2차연평해전(제2차서해교전) 
2002년 12월 19일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노무현 정부(참여 정부)

2003년 2월 25일 - 노무현 정부 출범 

2003년 8월 4일 -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자살 

2004년 3월 12일 - 

2005년 2월 10일 -

2007년 10월 4일 - 

2007년 12월 19일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이명박 정부

2008년 2월 25일 - 이명박 정부 출범 

2009년 5월 23일 - 노무현 前 대통령 자살 

2009년 11월 10일 - 대청해전 

2010년 3월 26일 - 천안함 피격사건 
2010년 11월 23일 - 연평도 포격사건

2011년 10월 26일 - 10.2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2011년 12월 17일 - 

2012년 4월 11일 -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4.11총선) 
2012년 1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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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기 전에>


나는 내가 서술한 글이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에 나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다루려고 한다.


1. 언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게 되었는가? (上)

2. 사건 배경 / 사건 일지 / 실제 사망자, 부상자 수 (中)

3. 지만원 박사가 '광주폭동'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下/정치 게시판)


즉, 이 글에서는 본인의 주관에 의해 광주사태의 성격을 규정하지 아니하고

1995년 7월 18일 당시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가 발표한 '5.18 수사보고서 전문(217쪽에 달함)'을 바탕으로 하여

본인의 주관을 배제한 채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 글을 서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광주사태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은 글을 읽어주는 여러분의 몫이다.

광주사태의 정확한 전말을 모른 채 다른 사람이 "민주화운동이다" "폭동이다" 하는 주장을 듣고 한 쪽의 주장을 신봉하게 된 독자들은

여태까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광주사태에 대한 지식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로 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또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작성한 글을 무슨 산업화다 역관광이다 하면서 이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자료는 '정치적 용도'가 아닌,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上편에서는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각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서술하였음을 밝힌다.


또한 글이 길어짐에 따라 광주사태는 '편을 나누어서 게재'하게 될 것이다.

일베를 많이 먹기 위해 나누어 올린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으나 이해해주길 바란다.


여튼, 5.18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게이들은 이 미천한 글을 자세하게 읽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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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관계자>


각 인물들의 성명 아래에 기입한 직책과 소개는 1980년 5월 18일 기준으로 하였음(조갑제, 지만원, 황석영 제외)

김영삼, 노태우는 두 사람의 관계와 두 사람이 관련된 사건이 5.18 특별법에 영향을 미쳤기에 따로 '대통령'직을 표시하였음


전두환 최규하 이희성 신현확.png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png

정호용 소준열 박준병 정웅.png  

주영복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png

권정달 조갑제 지만원 황석영.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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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12. 16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 문단은 http://www.ilbe.com/444663607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참고하십시오.


노태우 당선.png


198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당선된다.


김대중 김영삼.png


당시 야권에서는 통일민주당-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김대중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 하고

서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는데 두 사람의 득표율은 김영삼 후보 28.0% 김대중 후보 27.0%였다.

이 득표율 수치는 두 후보가 단일화 했을 경우 노태우(36.6%)를 거뜬히 제치고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걸 증명한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부터 함께 야당활동을 해왔던 두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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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11. 3 - 제5공화국 청문회>


국회.png


1988년 4월 26일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지 두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루어진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은 125석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59석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35석


여당 : 125석 / 야당 : 164석


이렇게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다.


5공청문회 노무현.png 


1988년 11월 3일


이에 야당은 노태우 정부를 압박하며 제5공화국 실세들을 국회로 불러들여 청문회를 개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고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5공 청문회)


이에 장세동, 이학봉,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 등 12.12 사태~제5공화국 출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이들은 물론

5.18 광주상태 당시 진압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주영복, 이희성, 소준열 등이 국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전두환 백담사.png  


5공 청문회의 열기는 대단했다.

대한민국 국민들 상당수가 5공 청문회에 집중하였으며

학생들과 재야 인사들이 연희동에 위치한 전두환 前 대통령의 사저로 몰려가서 화염병을 던지기도 하였다.


당시 야당과 국민들의 분위기로 봐서 전두환 前 대통령의 친구이자 동지인 노태우 대통령은 그(전두환)를 변호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에 전두환 前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 사저를 떠나 설악산에 위치한 백담사(절 이름)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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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노태우 대통령 각하 여의도 유세.png


1987년 12월 12일 - 제13대 대선 D-DAY 4일 전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여의도 광장 유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오늘의 약속을 포함해서

6.29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노태우 후보의 이같은 발언에 여러 가지를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노태우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범주에는 대통령직 사퇴도 포함된다.


중간평가 의견.png 


1989년 1월 17일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유세 당시 약속했었던 중간평가를 받을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 중간평가에서 자신이 국민투표에 의해 신임을 받았을 경우,

야당이 지금처럼 거세게 5공 인사들에 대한 청문회를 감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5공 청문회에 대한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 전두환을 살려보자는 뜻도 있었다.


중간평가.png


1989년 1월 24일


야당 세 명의 총재(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5공청문회에 전두환 前 대통령, 최규하 前 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합의하였다.

더 나아가 노태우 대통령이 약속했던 중간평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이를 대통령의 신임/불신임 여부에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태우 김종필.png 


1989년 3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를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중간평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중간평가로 인해 정국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노태우 김대중.png 


1989년 3월 10일


노태우 대통령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는 회담 자리에서 역시 중간평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간평가를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느냐?"


중간평가 유보.png 


1989년 3월 20일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일단 유보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야당의 세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의 발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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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12. 31 - 5공청문회 종료>


노태우 야3.png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의 세 총재를 만나 5공 비리, 구속자 석방, 광주사태, 남북한 관계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특히 청문회 정국을 연내에 매듭지을 것을 요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비췄다.

1. 전두환, 최규하 前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전두환 대통령 영부인)가 국회에서 증언을 해야 한다.

2. 5공 핵심인사들의 공직사퇴 및 사법처리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정의당(여당)은 다음과 같은 절충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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