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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간 일베 박정희 실드
게시물ID : sisa_2699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벌러덩
추천 : 2
조회수 : 86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12/05 04:22:15

박정희대통령이 100% 친일파가 아니라는거 증명한다. 정독해서 잘 읽어라.


만주에 거주하던 고구려의 유민, 즉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건국의 한 주체요, 한 기둥이었기에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는 제2의 조국과도 같았던 만주국에서 군관이었던 박정희를 일본군이라고 부르면 듣는 사람들이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박정희는 단 한번도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적이 없었음에도 일부 몰지각한 이들과 좌빨들은 사람들에게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하려는 나쁜 심보들이 있다. 

   만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정서상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이다.  행정적으로 엄연히 제3국이었기에 김일련은 태연히 만주국 관리로 복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서상으로도 생각해 보라. 삼촌은 광복군 장군 김학규인데 김희선 아버지 김일련이 만주국에서 경찰로 복무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무지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그런 일은 정서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다.

   자기 부친 김일련이 만주 독립군이었다는 김희선 의원의 주장은 무지에서 비롯된 거짓말이었다.  많은 좌빨들이 이 거짓말에 속았으며, 이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하여 국민을 기만하였다.  그러나 만주국 경찰은 일본 경찰이라는 좌빨들의 주장 또한 성립될 수 없는 거짓말이다.  만주 경찰이 결코 일본 경찰일 수 없었듯이 그 만주국군도 일본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오늘날의 시대에 많은 한국 국민이 마치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입은 일본군이었던 것처럼 속고 있다.  사실 김대중이 그 상징적 존재인 좌빨들의 친일인명사전은 박정희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에 일본군복을 입었던 김대중의 사진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위 동영상에서 윤리강사 이현이 열을 올리며 학생들에게 거짓말하고 있다.  정말로 전교조와 노사모 부류의 미개인들의 거짓말 창작 능력은 대단하다.  어떤 미개인은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보냈다고 사기치고, 위의 동영상에서는 한 미개인이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혈서를 쓰고" 등의 거짓말을 지어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반면, 윤리강사 이현은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혈서를 썼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미개인들과 좌빨들이 이런 거짓말들을 창작해낼 수 있었던 시절도 한 철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한 후로는 좌빨들이 이제 더 이상 이런 픽션소설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태껏 좌빨들은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 보냈다는 거짓말과 박정희가 1939년에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거짓말을 동시에 해왔었다,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혏서를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난 5일의 만주신문 기사 공개로 확증되었지만, 박정희가 1939년에 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주장은 허위주장이었음이 이미 지난 2005년에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의해 확인되었었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12/200512190078.html ).  그럼에도 이현같은 픽션소설가들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며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그런 허위사실 유포를 하였으나, 금번의 만주신문 기사 공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객관적인 사실로 쏠리게 되었다.

   위에서 우리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을 본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있다.  만약 자국군이었디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가?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온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기절초풍하지 않겠는가?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자, 박정희 준장이 1954년에 미국 육사(정확히 말해 포병학교)에 유학하였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미군이었는가?  전두환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육사에 유학하였었다.  그렇다고 전두환이 미군이었는가?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하였다. 

   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1950년대에 미국육사 연장교육 프로그램에 유학해 있는 동안 미국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야 했던가?  아니다.  유학생들은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았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다.  일본의 육사 57생기생들은 유학생들을 동기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단지, 같은 해에 재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육사 유학생들이 혈서를 썼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윤리강사 이현의 픽션소설 쓰는 실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팩트(facts)와 너무도 동떨어진 거짓말을 하는 자가 역사와 윤리를 강의하면 교육이 망가지지 아니하겠는가?


여기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보라!  박정희의 군복은 일본군복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일본의 황군이 아니었기에 일본군복을 입지 않았다.  조선인 일개 학도병도 일본군복을 입었으나,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일본군복을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주국군은 일본의 황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 기사를 공개하며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을 공개하였는바, 이 신문은 만주국 국민이 보는 신문도 일본인이 보는 신문도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측이 침략자로 규정하는 만철 기관지였다. 아마 민족문제연구소는 김구 선생과 그의 광복군 동지들의 증언을 더욱 신뢰해야 할 것이다. 

   그 기사가 공개되기 훨씬 오래 전에 이미 광복군 관계자들이 박정희가 그때 만주군관학교 진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청년 박정희는 1939년 3월 어느날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김정균의 일기는 적는다.  신영학을 통해 박정희를 소개받은 김정균은 이 청년이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에게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였다.

   김정균의 일기 또한 하나의 사료이다.  그리고 모든 사료의 신빙성은 역사학적 해석의 과제이다.  김구 선생과 청년 박정희가 1939년 3월 어디서 상면하였는지 우리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이 자료가 민족문제연구소 주장보다 훨씬 신뢰성이 있다.  박한용 연구원은 지난 12일의 100분 토론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지원안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였으므로 친일파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코미디였다.  1939년에는 아직 광복군이 창설되지 않았을 때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주장은 그 연대가 명백한 오류이니 1939년 3월 김구 선생이 박정희에게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권유했다는 김구 선생 최측근의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료의 중요성은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비밀광복군은 실재하였는가?  비밀광복군은 정말로 있었다.  CIA가 정말로 있는가?  정말로 있다.  무엇이 미국 CIA의 전신이었는가?  1942년 6월 창설된 OSS(미국 전략첩보국)이었으며, 그 핵이 바로 광복군 OSS였다.  이것이 팩트이다.

   비밀광복군설의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사망)씨가 쓴 소설 ‘광복군’이다. 광복군 출신인 박씨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일제 말기 행적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소상히 묘사했다. ‘광복군’에 따르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게 골자다.

   “대통령이란 그분의 위치가 위치인만큼 오해를 사기 쉬워 도에 넘칠 정도로 그분에 관한 것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본인의 교열까지 받았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고 저자는 ‘광복군’ 서문에 썼다.  비밀광복군설에 반대하는 자들은 박 대통령이 책을 받으신 다음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고 화를 내셨다는 풍문을 인용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설 공개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비밀광복군이 없었는가?  미 국방성이 몇 해 전에 광복군 OSS 상륙훈련작전 영상물을 공개한데 이어, 지난 해에도 미 국립문서보관서가 광복군 OSS 요원들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자, 모든 독립운동 사료들이 광복군 OSS 첩보전이 미국의 이승만 박사와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 주도 하에 진행되었으며, 그 첩보전 실행의 핵이 박정희였다고 밝히고 있다.  자, 여기 아래에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독립운동 사료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진은 박정희가 광복군 OSS 첩보요원이었던 시절의 모습이다.  일본 편에서도 박정희를 일본군으로 간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는 물증이 바로 박정희는 일본육사 다닐 때도 일본육사 정규생도가 아니라는 표시로 만주군 복장을 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영친왕은 일본육사시절 당연히 일본 사관생도 복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아래의 복장으로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는 일본군은 아니었으되 일본군 내부를 깊숙히 알고 첩보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여기 1945년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서술한 세 권의 책이 있다.  왼편부터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바로 1967년에 출판되었던 도서 "광복군" 중 핵심 내용을 보여주는 두 페이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소설 형식의 이 증언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소설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 미 국방성과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광복군 OSS 자료들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독립군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 책의 내용이 정확하다.

   좌빨들은 만주에 독립군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주장해 왔으나 이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다.  1920년의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의 조종을 받은 조선인 공산당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아 태반이 사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여운형이 배심원이었던 재판으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가 독립군이 괴멸되었다.  이후 독립군은 다시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에 창설된 광복군 소재지는 만주가 아니라, 중국 임시수도 중경이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정규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첩보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참전국으로서의 임정 광복군의 주요임무는 비밀광복군, 즉 광복군 OSS를 통한 첩보전이었음을 광복군이 쓴 역사소설 "광복군"은 증언한 것이며,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음이 이제 명확하게 입증된 것이다.

   만약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역할이 없었다면 조선은 영영 독립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미국은 몇차례 일본과의 휴전을 고려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다.  왜 미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과 휴전하였는가?  유엔군의 승리할 승산이 있음을 보여주는 첩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는 그 출처가 박정희로 거슬러올라가는 첩보가 있었다.  이른바 관동군 주력부대가 남양군도로 이동하였다는 첩보였다.  연합국으로서는 이 중대한 첩보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오로지 광복군 OSS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고, 광복군은 박정희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의 고급기밀을 빼올 수 있는 유일한 조선인 만군 군관이었다.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가 바로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스승이었으며,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진학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후원자였으며,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격려하며 관동군 기밀을 빼주었다.  아리카와 대좌가 남양군도로 출전하면서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그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음.)  일본은 연합국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 관동군 주력부대를 남양군도로 빼돌리고 있었는데, 이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누설하였으며, 이 정보가 광복군에게로, 광복군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이 광복군과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였을 때 미국이 깜짝 놀랐다.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으나, 일본이 그토록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항복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아니라, 관동군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저항 국민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천황이 선수쳐 항복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입수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관동군 고급군사기밀 첩보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가!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가 백범일지에도 실려있다.  아래는 백범 김구 선생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 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그리고, 이 광복군 OSS, 즉 비밀광복군에 대한 김구의 이 기록의 사실성은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 해(2008년)에 공개한 자료로 다시 한번 확증되었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자료가 밝히듯이 미국 OSS는 그때 광복군에 200명을 더 모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기록과 일치하며,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승만 박사가 창설에 큰 기여를 한 OSS(미국 전략정보국) 아시아 지부 광복군 OSS의 첩보전 만군 소위 박정희가 큰 기여를 했다는 증언은 김구 계열의 광복군 인사들만 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선배로서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해방후에는 우사 김규식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이 저술한 아래의 도서 "해방 3년사를 보라."

   1985.9.20에 초판이 발행되고, 1989.3.15에 재판이 발행된 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박승환은 국내 항일 지도자로서 여운형과 긴밀한 유대와 연락을 가지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일본군의 조선출신 장교로서는 당시 최고 계급이던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남방전선으로 전출되기 전까지)과 상호 긴밀한 유대를 견지하고 만주국에 군적을 둔 조선출신 장교를 상당수(60-70)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런 한편 그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패전이 결정적으로 예견된 1944년부터 위에서 말한 조선출신 장교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엄밀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달에 한번씩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한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결합과 인근주재 부대의 통합으로 약 1개 사단병력을 편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편성을 모의하고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만주에서의 박승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출신 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박정희 전대통령도 있으며>>

  송남헌의 "해방 3년사"보다 일년 앞서 발행된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역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 정 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도 일치하는 증언이다. 

   좌빨들은 좌파 사학계의 거장 송남헌의 이 기록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기록을 부정할 때 좌파 사학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러시아 붉은군대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괴멸시켰던 여운형, 해방을 앞둔 시기에는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던 여운형이 그래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색을 내려면 건국동맹 활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군사행동을 위한 건국동맹의 실제적 주역은 만주건국동맹이었고, 만주건국동맹이란 여운형을 추종하던 만주국군 군관 박승환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다.

   미국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8월 중 한반도 침투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은 광복군에 병력 추가 모집을, 그리고 본토에 침투 작전시 협력할 연계 세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는 민족주의 계열이냐 공산주의 계열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박정희 만군 소위에게 국내 진공 계획에 참여하라고 밀서로 지령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여태 모르고 있었는가?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조차 미주 한인 80 여명이 첩보기관 OSS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60 여년간 감추어 왔다.  일본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요구로 일본 정부가 원산상륙작전에 참전케 한 일본인들이 국익을 위해 그 사실을 평생 비밀로 하여야 했다.  극동 CIA 전신인 비밀광복군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극동 CIA 담당자가 혁명 주체는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미국의 입장은 군사혁명 지지를 기정사실화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문용채는 비밀조직으로서 만주국군 내에 비밀광복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 
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 
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 
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 
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 
운동단체이다.>>

  이외에도 모든 증언들이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시 태평양전쟁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ㄹ련의 사건들 및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 만주국군 보병 8단 박정희 소위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입증한다. 적어도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 장교단이 주축이었던 만주건국연맹이 있었다는 사실을 좌파 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여운형은 완전 부정되며, 여운형이 완전 부정되면 좌파의 역사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 24일 작성)    


http://bookstore21.net/korean/815/park-oss.htm

http://bookstore21.net/korean/815/japan-army-uniform.htm

http://hot-news.kr/detail.php?number=10468&thread=27r01

여기까지가 내가 자료구하다가 알게된 사이트에서 박정희 친일파논란의 진실이다.


그럼 여기서 쓰는건 내가 알아본 내용의대한 결론이다. 잘못된점 있으면 짚고 넘어가주면 수정하겠다.


박정희대통령이 일본충성혈서 쓴건 좌빨들이 지랄하길래 검찰에서 고소하고 판사가 거짓이라고 판결낫엇구만...
무엇보다 박정희대통령은 일본육사출신도 아니고 일본포병학교 유학생신분으로 일년간 이수하고 만주군장교로 갔다.
심지어 그 유학생들은 일본인이랑 같이 공부하지도 않고 유학생반은 따로있었다,심지어 조선인은 일본장교를 시켜주지도 않았고
그당시 만주국은 일본이 세운 괴뢰국이지만 나름 정부도 있었고 자치권도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박정희가 군인이 되고싶고 만주국은 옛날 발해의땅이었고 간주이주민들이 살던곳이니까
그곳을 택한것일뿐임.

그리고 그런 박정희대통령은 만주장교시절 오히려 각시탈같은 인물이었다.
일본군 군사기밀을 광복군이랑 미군한테 넘겼었다. 그이유는 한국의 광복을 위해서였음
후에 김구의 자서전에도 박정희대통령이 그런일을 했다는게 적혀있음 뿐만아니라 미국 군사기밀에도 한차례 정보 공개해서
입증된바임

또 박정희대통령이 만주장교시절 독립군을 토벌했다는데 이것도 거짓이다.
박정희대통령은 공산괴뢰집단 마오쩌둥의 팔로군을 토벌한거고 국민당 장제스 군인은 잡지도 않았음

무엇보다 그 팔로군소속 사회주의독립계열 김두봉(훗날 북괴에가서 북조선노동당 최고위원장이됨)의 조선의용군을 토벌하고 다닌건
친일파논란을 겪고 계신 백선엽장군이시다.이게 박정희로 와전됐음;;;박정희대통령은 친일파도 아니고 독립군도 죽이지않음
백선엽장군은 독립군을 총으로 쏴죽였다, 이건 잘못됐다. 어찌됐든 사상의 좌우를 떠나 독립을 위해 싸운거니 
이런점은 백선엽장군도 자서전에서 본인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음.



출처:http://www.ilbe.com/45826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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