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뷸런스 한 번 이용하는데 기본 100만 원, 여덟 바늘 꿰매고 실밥 뽑는데 200만 원, 위 수면내시경 검사 400만 원, 팔 골절 수술 2000만 원, 맹장수술 4000만 원, 제왕절개 수술 5000만 원, 뇌종양 수술에 2억 원의 병원비 청구서를 받았다는 얘기는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일이 아닙니다."
미주 한인 여성 492명이 자신의 실명을 내걸고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적게는 몇 년, 많게는 몇 십 년 동안 미국 사회의 실상을 속속들이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한미FTA'가 가져올 결과가 '괴담'이 아니라 '사실'이라며 반박하고 나선 것이어서 주목된다.
미국 거주 한인 여성들의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미씨USA'와 '미즈빌' 회원들은 12일(현지 시각) 발표한 선언문에서 "우리는 미국에 살면서 한 번 잘못 체결한 FTA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날마다 실감하고 있다"며 '한미FTA 비준안'의 즉각 폐기를 촉구했다.
"앰뷸런스 한 번 이용에 100만 원, 맹장수술 4000만 원... 우리가 증인이다"
미국 뉴저지주에 살고 있는 케일리 김(40)씨는 6년 전 딸 아이 출산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뒷골이 서늘하다. 25주 조산아로 태어난 아이는 3개월 동안 인큐베이터에 있었고, 미숙아 망막증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건강해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김씨는 며칠 뒤 병원에서 날아든 청구서를 받아들고서 깜짝 놀랐다. 청구서에는 110만 달러, 약 13억 원이라는 액수가 적혀 있었다. 김씨는 "다행히 보험이 있어서 파산은 면했지만, 보험 없는 사람이 5명 중 1명꼴인 미국에서 의료비는 정말 공포 그 자체"라고 말했다.
김씨는 최근 자신이 즐겨 찾는 '미씨USA'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솔깃한 제안을 발견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여성들이 '한미FTA 반대' 선언문을 만들어 서명을 받고 있었다. 김씨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서명란에 자신의 실명을 올렸다. 비록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한미FTA'는 미국과의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미FTA 체결 이후 조국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무섭다"며 "실제 의료 민영화의 폐단을 몸소 겪고, 빈번한 소송으로 이익 챙기는데 익숙한 미국에 대해 한국에 계신 분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 한미FTA를 반대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서명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씨를 비롯해 492명의 미주 한인 여성들이 참여한 '한미FTA 반대' 선언문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 (Occupy Wall Street!)' 시위는 화려함 뒤에 가려진 미국경제의 위기와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할 만한 대한민국의 이상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특히 미국에서의 실생활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의료 서비스 등 공공복지 서비스 분야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의료 민영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경험자요, 생생한 증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또 "식당이나 마켓, 세차장, 공원 등 어디를 가더라도 고된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멕시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며 "지금 발견된 위험요소들을 모두 무시하고 한미FTA를 체결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이들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경고했다. 1994년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뒤 자국의 경제기반을 상실한 멕시코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미국 국경을 넘고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며 '마약 소굴'에까지 몸을 담게 됐다는 것이다.
서명에 참여한 김상륜(36, 시카고)씨는 "한미FTA는 단순히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도 아니고, '미국이 유리한 협상'도 아닌 '한국과 미국의 대기업들'을 제외한 (양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불리한 조약"이라며 "그 대가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혹독히 치러야 하는 무서운 조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미FTA를 반대하고 전면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인 입장이나 편 가르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생존권의 문제라는 걸 널리 퍼뜨리고 싶다"고 밝혔다.
"미국의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는 멕시코가 한국의 미래?"
선언문을 작성한 김미숙(54.캘리포니아)씨는 13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한미FTA로 인해 대한민국은 잘 돼 봤자 (현재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는) '미국꼴' 나는 것이고, 잘못하면 멕시코처럼 될 수 있다"며 "두 나라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상위 1%만 잘 사는 미국이나, 미국에 와서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는 많은 멕시코 사람들의 상황이 조국의 미래가 된다는 것은 정말 끔직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한인 여성들이 각자의 실명을 걸고 개별적으로 참여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참여한 주체가 명확해야, 그 메시지가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언문 발표를 제안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500명 가까운 회원들이 동참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사실 김씨가 미주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을 상대로 '한미FTA 반대' 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을 받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동안 미국 내에서 활동해온 '한미FTA 찬성' 단체들 때문이었다. 김씨는 "미국에 있는 여러 한인 단체들이 기자회견도 하고 집회도 하던데, 정작 그 단체에 회원이 1명이 있는지, 100명이 있는지 실체가 불분명하다"며 "특히 그들의 의견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한국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10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앞에서는 '한미FTA 비준촉구 궐기대회'가 열렸지만, 행사 참가자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같은 날 '한미FTA 비준 범동포 뉴욕 추진회의'라는 단체도 뉴욕 맨해튼의 한 식당에서 한국 국회의 조속한 비준안 처리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단체는 뉴욕의 상공인단체,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이 모여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참석자는 수십 명에 그쳤다.
앞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미FTA 이행법안'을 미 의회에 제출한 이튿날인 지난 4일 '뉴욕 한인 풀뿌리 시민단체' 회원 100여 명도 워싱턴DC 의원회관을 돌며 법안의 신속처리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