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이봉창 저격 일황 부중"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니 명중치 못하였다.)
....
김구는 이봉창을 데리고 안공근의 집으로가 선서식을 행하고
일본 천황에게 쓸 폭탄과, 자살용 폭탄
두개의 폭탄을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백원을 주면서,
"이돈은 동경까지 가기에 쓰고 전보를하면 돈을 더 보내마" 하고 말하였다.
기념사진을 찍을때에 내 낯에 처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봉창은 나를보며 말했다.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
당시 불행이라는 문구를 넣어
"한인 이봉창 저격 일황 불행부중"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않음)
위와같이 발간했던 중국의 모든 신문사는
일본정부의 항의로 모두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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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믿었던 제자이자 동지였던
나석주는 서울 동양척식회사에 침입하여 7인의 일본인을 쏘아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은 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다.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의 암살을 계획할즈음...
윤봉길이라는 남자가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홍구의 소채장에서 소채장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윤봉길 군은 애초에 상해에 온것이
큰일을 하려 함이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죽을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
내게 동경(이봉창 일황 저격)계획과 같은일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 하였다.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게"
후일,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점심벤또(도시락) 물통 하나
그리고 일장기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김구는 곧바로 김홍일을 방문하여
벤또그릇에 폭탄장치를 하여 사흘안에 보내주기를 부탁하였다.
입고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은후
이 폭탄을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
이르고 이집 저집에 감추어 두었다.
점점 4월29일이 박두하여왔다.
윤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김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띄고 만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조반을 지어달라 부탁하였다.
이틑날은 4월 29일 이었다.
김구는 김해산의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하였다.
밥을 먹으며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습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하고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김구에게 권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일이 많은데, 윤군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데로 보낼것이 무엇이오?"
김구는 대답했다
"일은 하는사람에게 맡기는것이 좋지. 윤군이 어디 무슨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식사가 끝나고 시계가 일곱점을 친다.
윤군은 말없이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김구에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시간 밖에 쓸 데가 없으니까요."
식장으로 가는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까지 꺼내어 김구에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김구의 말에,
윤군은,
"자동차값을 주고도 5,6원은 남습니다."
할즘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김구는 메이는 목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김구를 향해 숙였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 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은 즉사, 백천대장, 중광대사, 야촌중장등 문무대관 다수 중상"
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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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를 읽다가 너무 눈물이나서
하권중 일부를 잠깐 옮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