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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노무현 대통령의 군생활
게시물ID : bestofbest_408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키라가곧정의
추천 : 207
조회수 : 25172회
댓글수 : 6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0/09/27 20:08:05
원본글 작성시간 : 2010/09/27 13:45:38
 


  


[국방일보] 2003.11.7일자 
어려운 일 잘하는 사람이 군생활 잘하는 사람 

국방일보 ‘추억의 내무반’이 100회를 맞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100번째 필자로 기고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 아울러 지금도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는 국군 장병 여러분의 노고에 치하와 격려를 보냅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입니다. 청와대 주변에도 낙엽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가을 낙엽은 보기에는 멋지지만 장병들에게는 떨어지는 즉시 치워야 할 ‘애물단지’입니다. 낙엽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곧 눈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대도 눈이 참 많이 내리는 곳이었습니다. 눈을 보기 힘들었던 김해와 부산에서만 살다가 입대한 저는 하얗고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이 마냥 신기하고 좋아 보였습니다. 부대에 첫눈이 내렸을 때 무심코 “와, 눈 한번 멋지게 내린다”고 말했다가 선임병에게 눈물이 찔끔 나도록 혼쭐났습니다. 눈을 치우는 일이 그렇게 고달픈 일인 줄 눈이 온 다음에야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그때 눈 치우던 생각을 하면 정신이 다 아찔해집니다. 

저는 병사 출신입니다. 일반 병사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1968년 3월에 군번 ‘51053545’를 받고 입대해 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지금도 병장을 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당시에 베트남 참전 장병들이 많아 병장 정원이 크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원주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는데 신병 시절을 힘겹게 했던 것은 시도 때도 없는 ‘사역집합’이었습니다. 사역이라는 것이 일과가 없는 시간에 집중되다 보니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휴식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도 군기가 바짝 든 신병이었기에 '사역병 집합' 구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제일 먼저 뛰어나갔습니다. 

당시 제일 편한 사역은 연병장에서 클로버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잔디밭에 앉아 클로버를 뽑는 일은 단순하고 쉽기도 했지만 슬글슬금 요령을 피울 수도 있는 꽤 괜찮은 사역이었습니다. 

군생활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유난히 센 군기와 잦은 기합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관부가 당시에는 담뱃값 정도 챙길 수 있는 자리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1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전방 차출이 있다는 소식에 즉각 지원했고, 곧 12사단으로 옮겨 갔습니다. 지원할 때에는 호기롭게 했습니다만 막상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방이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하던 그 원통이었습니다. 

군사령부 부관부에서 고생한 탓에 이번에는 일반 보병중대로 배속되기를 바라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대대 CP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휴가 가는 선배들이 “중대에서는 근무 중에 졸면 목을 베어간다”고 어찌나 겁을 주던지 결국 저는 대대장 당번병으로 주저앉게 됐습니다. 그리고 건봉산 대대 상황실에서 몇 달 동안 생활했습니다. 

비록 철책 근무를 서는 보직은 아니었지만 휴일도 없이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는 새우잠을 자야 하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매일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전방 철책중대로 가서 중대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마침내 소대에까지 내려가 철책근무하고 GP근무도 하다가 전역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방이든, 후방이든 쉬운 곳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겨내지 못할 만큼의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보람도 얻고 군생활에 재미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적극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자원하는 사람이야말로 군생활을 가장 잘하는 사람입니다. 

군대 동기 중에 엄창호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항상 어려운 일, 궂은일을 도맡아 앞장섰던 친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군의 날 행사에 차출되면 몇 개월 동안 여름 땡볕에 고생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누구나 꺼릴 만한 제병지휘본부 차출을 자원했습니다.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해 사열하면서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언제나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남자들은 셋만 모여도 밤을 새워 군생활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힘들었지만 자랑스러운 경험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군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환경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야전삽 하나와 곡괭이 하나를 주고 벙커를 지어내라고 하면 전쟁 때 쳐놓았던 유자망을 철사 삼아 통나무를 엮어 귀틀집 같은 벙커를 지어냈습니다. 

전역 후 제가 사법시험에 도전하고 또 어려움 속에서도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군에서 단련된 ‘하면 된다’는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리더십을 키우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군에서 터득한 이러한 교훈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국군은 나라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자 대들보와 같은 존재입니다. 지난 국군의 날 행사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 군의 위용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국가안보뿐 아니라 국민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 존재감은 더욱 커져 보입니다. 지난 태풍 피해 복구에도 우리 장병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힘들지만 조국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은 무엇보다 값지고 영광된 일입니다. 우리 국민은 한없는 믿음과 애정을 갖고 우리 군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군생활에 무운을 기원합니다. 

2003년 11월 7일 
노무현 대통령 

[국방일보] 2002.12.21
軍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곳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군생활은 한마디로 평범함 그 자체였다. 그의 군생활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착실하고 모가 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졸업한 뒤 입대한 노당선자는 최전방 부대에서 남들과 똑같이 구르고 뛰며 군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주어진 일은 똑똑함과 남다른 책임감으로 완벽에 가깝게 처리, 지휘관으로부터 장교 이상의 인정을 받았다. 대인관계도 좋아 남이 싫어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며, 그런 성격 때문에 선·후임 모두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정규 병사 출신으로서는 헌정 사상 첫 대통령이 되는 노당선자는 22세 때인 1968년 3월8일 군번 `51053545'를 받고 입대했다. 처음에는 육군1야전군사령부 병역계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입대 전 그는 사법고시에 응시, 예비합격한 상태여서 행정병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육군을지쌍용부대 2대대로 전출돼 제대할 때까지 최전선을 지켰다.
 노당선자가 근무한 곳은 동부전선상에 있는 건봉산 정상 부근. 인접한 향로봉과 함께 지금도 겨울이면 가장 추운 곳이다. 노당선자와 함께 근무한 국중선(57)씨는 “5월 초까지 잔설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서 “추울 때는 거짓말을 보태 옷을 20벌 가까이 껴입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대대장으로 지금도 노당선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노무식(예 ·육군소장 ·육군칠성부대장 역임)장군은 “방한 대책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인지 당시에는 유난히 추웠다”면서 약간 과장이란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혹독한 추위를 설명했다. 
“건봉산 인근에 향로봉이 있는데, 폭설이 내린 후 바람이 불면 향로봉과 건봉산 사이의 큰 골짜기가 평평하게 이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봄이 올 때까지 꼼짝도 못합니다. 특히 겨우내 바람은 얼마나 세던지 머리에 눌러 쓴 철모가 날아가고 비탈길을 돌던 지프가 넘어질 정도였습니다.”

역시 전우였던 조한근(54)씨는 “겨울이면 계곡까지 물을 길으러 갈 수 없어 눈을 녹여 식수로 썼다. 밥을 짓고 난 물로 계급 순으로 얼굴을 씻고 빨래를 했다”고 회고했다.
노당선자가 입대한 68년은 청와대 습격(1월21일), 푸에블로호 납북(1월23일),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10월30일~11월2일)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였다. 노무식 장군은 “`근무 중에 졸면 목이 베인다'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노당선자는 대대에서 정보과의 정보상황병으로 근무했다. 공비와 관련한 정보 수집 ·분석 업무에 투입됐다. 철책경계 근무는 서지 않았지만 업무 강도는 오히려 더했다. 정보과는 24시간 주야 구분 없이 움직여야 하는 부서다. 휴일도 없이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 새우잠을 자는 생활이 1년 내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노당선자는 고시 예비합격자답게 전문성이 요구되는 정보 분석 업무를 깔끔히 처리, 늘 주위를 놀라게 했다. 추운 겨울 상황실이 춥지 않도록 불을 때고 물을 데우는 일도 솔선했다.
고시 예비합격자답지 않게 늘 겸손하고 모가 나지 않아 주위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이와 관련한 일화 한 가지. 후배 병사가 장교용 바둑판을 몰래 빼내 온 일로 부대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 이때 노당선자는 후배의 허물을 “내가 했다”고 뒤집어썼다.

노당선자는 34개월을 꽉 채우고 71년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당시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대거 귀국하는 바람에 병장 정원수가 다 차버려 만기가 됐음에도 병장 계급장을 달 수 없었다.
 노당선자는 평소 군대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군에서 유난히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시 예비합격자로서 군생활 3년여의 기간이 중요했지만 정작 군에서는 공부에 필요한 시간을 낼 수 없어 더더욱 그러했다.

노당선자는 하지만 `군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한 인터뷰에서 “사회에서 힘든 일을 겪어보니 군대 시절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면서 “군시절 부하의 잘못을 덮어쓰는 장교를 보면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말했다.
아들 건호(30)씨가 입대할 때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한다. 그것도 힘든 데로 가야 한다”고 권했다. 건호씨는 92~94년 강원도 화천 육군이기자부대에서 병사로 군복무를 마쳤다.

■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 다음날. 당선자 신분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곳은 자신의 출신부대였다. 육군을지부대. 대통령 당선자 환영식을 위해 우리 사단 군악대도 차출되었는데, 나같은 병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에 묘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남은 군생활, 국군 통수권자로서 예비역 상병 출신 대통령 노무현을 모시며 군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나 자신이나 후임병들에게 "대통령도 우리처럼 평범한 육군 병사출신이었다" 말하며 자긍심과 격려를 얻고는 하였습니다. 문득 그 시절 제가 국방일보에서 읽었던 기사가 생각나, 다시 찾아 올려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노무현 前대통령님은 예비역 병장들의 자랑인 것 같습니다.

 ■ 제가 군생활할 때 국방일보에 "추억의 내무반"이란 코너가 있었습니다. 사회 명사(名士)들이 자신의 군생활을 회상하며, 군복무가 이후 자신의 사회에서의 성공에 초석이 되었음을 소개하는 연재코너였습니다. 사회에 나가 무엇을 할까, 군생활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군시절,  나름 많은 조언을 주었던 "추억의 내무반"!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白眉)는 마지막회(100회)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였는데요, 문든 그 신문기사가 생각나 국방일보를 검색하다 스크랩해 올립니다. '추억의 내무반' 아마 단행본(『성공하고 싶으면 군대에 가라』,국방일보엮음, 중앙M&B,2003)으로 출간된 것으로도 압니다. 입대를 앞두신 장병들에게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가까운 도서관 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거에요~^^

 ■ 대통령 출신부대- 군대에서 명예롭게 생각하는 부대역사 중 하나가 '대통령 출신부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7사단(박정희 전대통령), 9사단(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유명합니다. 군사정부 시절 주로 대통령이 사단장을 했던 부대에 붙여졌던 칭호인데요. 문민정부 등장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2003년 새롭게 한 부대가 추가됩니다. 을지부대가 그것이지요. 사단장이 아닌, 육군 상병 출신의 부대~! 하지만 대한민국 그 어떤 대통령 출신부대보다 자랑스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을지부대 출신 분들 현역 때나 지금이나 부럽습니다. 자랑스런 대통령 출신부대! 앞으로 더 많은 대통령 출신부대가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 물병장과 가라병장의 어원- 한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육군 상병 출신이라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전역한 1971년경, 당시는 베트남에 참전했다 돌아온 군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대개 자기동기들보다 한,두 계급 진급해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육군에는 병장의 숫자가 유난히 많았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군 전체에서 계급별 TO(정원)을 통제했는데, 그러다보니 상병전역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생겨난게 '물병장'과 '가라병장'. 정원통제를 피하기 위해 해당부대에서 전역 2~3일전에야 병장으로 진급시킨 후 바로 전역시켜 버리거나(물병장), 아예 상병으로 전역하고도 집에 가는 길에 군장사에 들려 병장계급장으로 오버로크를 치고 집에 가는 사람(가라병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물병장과 가라병장. 이상은 군에서 30년이상 인사계통에서만 하신 간부로부터 전해들은 말이니 나름 신빙성이 가는 말이라 본다. 어쨌든 물병장, 가라병장과 달리 떳떳하게 육군 상병 전역이라 밝히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모습은 그의 솔직함을 발견할 수 있는 또다른 대목이라 본다.^^

내가 대통령한테 싸인 보내달라고 했는데 진짜 보내준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 밖에 없다. 
그게 홍보물일지라도 당시 무지 기뻣었는데.. 보내는이 청와대 받는이 XXX 우편함에 꽃혀있던 금색의 우편물.

당신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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