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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흔하지 않은 변호사들
게시물ID : sisa_2758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평범22
추천 : 1
조회수 : 25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9 19:36:05



노무현이 재야, 양심적 변호사로 ‘전신’하는 데는 문재인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였다. 나이는 다소 아래지만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거지는 존경할만한 사람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관계는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중국 명말 청초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였다. 노무현은 뒷날 자서전에서 문재인과의 관계를 이렇게 썼다. 

문재인 변호사와 손을 잡았다. 원래 모르는 사이였지만 1982년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소식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서도 판사 임용이 되지 않았다. 

정직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시 세속적 기준으로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사건도 많았고 승소율도 높았으며 돈도 꽤 잘 벌었다. 법조계의 나쁜 관행과도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정권에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면 나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주석 32) 

문재인은 그 당시 노무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은 변호사 업계에 동업자제도 자체가 거의 없었다. 
‘노변’과 나는 실제 변호사 업무가 많아서, 필요에 의해 동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와 나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한 경희대 출신이다. 판사 임관이 될 줄 알았던 나는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임용이 거부됐고, ‘노변’의 경우 동업하기로 했던 사람이 판사로 임용돼 우연히 동업자 관계로 만난 것이다. 

당시 ‘노변’은 부산상고 출신인 때문인지 세무 회계쪽으로 ‘잘 나갔다.’ 실제로 ‘노변’은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 씨가 대표로 있던 (주)삼화나, 조선 견적 등 승률 90퍼센트 이상이었다. 이런 높은 승소율은 당시 사무장이 소송서류의 대부분을 작성하는 관례를 깨고, 자기 이름으로 제출되는 소장은 자신이 직접 작성하는 성실성과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주석 33) 


주석 
29> <운명이다>, 85쪽. 
30> 앞의 책, 122쪽. 
31> 송기인, "그가 우리 각자인 동시에 모두이기를", <노무현이 없다>, 116쪽. 
32> 앞의 책, 83쪽. 
33> 정재현, 앞의 책, 192~193쪽.
 



원문출처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85883#recentTrack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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