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까말까 며칠을 고민했는데 누구한테 속 시원히 털어놓지도 못했고 이렇게 있다간 제가 정말 죽기라도 할 것 같아서 길고 지루한 얘기를 써봅니다. 그냥 제가 어딘가에 이걸 털어놨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아요. 그 누구한테도 말 못할 얘기니까요.
그 사람과 알고 지낸지는 거의 5년, 연애한지는 2년 다되어갔었습니다. 결론부터 적자면 헤어졌는데, 사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헤어진건지 뭔지 감도 잘 안오고 하루종일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서 일부러라도 좀 바빠져보려 하는 중이예요. 가만히 있으면 화도 나고 우울하기도 하고 찾아가서 길길이 날뛰고 싶다가도 그냥 죽고싶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 마음 누가 알아줄까 모르겠네요.
저와 그 사람은 경제적으로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그 쪽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고 하루하루를 최저 시급을 받으면서 본인의 단어 선택에 의하면 '개처럼 일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저는 반대로 부족함 없이 자라 어려움을 크게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실 벌이가 시원찮은 부분도 물론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하루살이같이 산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남들이 사서 걱정이다 싶을 정도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었고 그 사람은 그 날 그 날을 '버텨낸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배워서 내 집 마련에 대한 생각을 하고, 저축하고, 적금을 관리하고, 주택청약이나 주식같은 걸 해왔고 그 사람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끔 저한테 네가 허락만 한다면 너랑 결혼하고 싶다, 너랑 살면 좋겠다는 말을 했지만 계획은 없었고 단지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이었어요.
그런 부분이 답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잔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이 나이쯤 먹었으면 네 월급, 네 적금 정도는 직접 관리해야지. 못하겠으면 나랑 같이 해보자. 집은 생각해보고 있니? 그러면 그 사람은 "그렇긴 한데 부모님이 관리하시는거라..." 같은 반응으로 일관했어요.
그 사람이 딱히 부모님께 큰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예요. 자기를 너무 구속하려 든다, 너랑 있을 때만 숨통이 트인다, 집 나가고 싶다고 항상 말했어요. 제가 집 떠나고 싶다면서 노숙할 수는 없으니 그럼 단칸방이라도 집 마련해볼 구체적인 계획이 있냐고 물으면 또 얼버무리고, 그렇게 또 하루를 의미없이 보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사람은 대단한 마마보이였어요. 마마보이라고 하면 굉장히 발끈했지만,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었어요. 저와 나눈 카톡 대화까지 부모님이 확인하셨거든요. 물론 자의로 보여준 게 아니라 강제였다고는 하지만 (이 부분은 이야기가 깁니다. 그 사람의 차에서 저랑 사용한 콘돔 포장지가 부모님께 발견됐고, 어디서 누굴 만나고 다니냐는 추궁 끝에 그렇게 된 거예요.) 사적인 대화 내용이 낱낱이 보여진 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제 변명이예요.
헤어지게 된 계기가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저와의 카톡 대화를 보자마자 저에게 연락을 취하셨어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핸드폰을 압수해서, 마치 그 사람인척 저에게 카톡을 하신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채 그 사람과의 약속인 줄 알고 그 날 있던 일정들을 급하게 끝마치고 약속장소에 나갔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그 아버지셨던 거죠.
처음엔 제가 너무 일찍 나와서 그 사람이 아직 오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야 사실을 알게 되고 당혹스러워하는 제게 그 사람의 아버지는 냉랭하게 말씀하셨어요. "넌 너무 내 아들을 힘들게 해. 이만 관계를 끊어줬으면 좋겠다." 라고요. 어처구니 없죠. 드라마도 이렇진 않을거예요.
저는 웃기게도 해명했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생활패턴과, 어린애같이 부모님께만 맡겨둔 미래를 바꿔주고 싶었다고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고요. "그건 부모인 우리가 손 대야할 부분이지,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맞는 말이었어요. 순간 친구로 지냈던 3년과 연인으로 지냈던 2년이 모래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슬픈 감정과는 조금 달랐는데, 저는 그만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어요. 주제넘게도 내가 사람을 바꿔놓으려고 했구나.
그렇게 그 사람은 핸드폰 번호를 바꿨고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이젠 모르겠습니다만) 당사자와의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 사람네 아버지의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연락이 없습니다.
끝난 것 알아요.
하지만 바쁘게 지내다가도 잠깐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그 날의 그 상황이 자꾸만 떠오르고, 그 사람 혹시 나한테 연락하고 싶은데 내 번호를 잊어버려서 못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부모님이 감시해서 못 하고 있는 걸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어요.
항상 사랑한다고, 내가 자신의 미래라고, 나만이 숨 쉴 구멍이라고 말해줬던 게 거짓말이었고, 사실은 제가 하는 충고들과 잔소리에 숨이 막혀서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한 거였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파요. 가슴이 먹먹하고, 배신감도 들고, 그리고... 모르겠어요.
딱히 댓글을 바라고 쓴 글은 아니고... 그냥 대나무숲이라 생각하고 외쳐봤습니다. 길고 지루한 넋두리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연게 여러분들께는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연애의 끝조차 남의 손에 맡겨버리는... 정말 와닿아요. 그 날 하루종일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어떻게 이별조차 아버지가 대신 말씀해주셨어야 했는지. qetuoadgj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다행이라 생각할 날이 올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문제있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할만큼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고, 이기적이지만 바라게 되네요. 그 때 가선 이 댓글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저는 이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글쓴 분도 그분도 안타깝지만 조심스럽게 얘기드리고 싶은건 솔직히 그렇게 다 큰 아들연애마저도 조종? 하려는 부모밑에서 자란 그분이 마음이 아프네요.. 혹시 그분이랑 직접 얘기한게 아니라면 이게 진정한 이별인건지 대화로 확인해보는게 어떨까 하는 의견을 드려봅니다..
대화... 할 방법이 있었다면 제가 벌써 몇 번이나 했겠지만... 대화를 할 길이 없어요. 번호는 바뀌었고(카톡 번호 친추해보니 유효하지 않다고 나오고) 직장에 대해선 간간히 사진으로만 받아봤고 위치를 알려준 적이 없더라고요. 이게 진정한 이별인지 저도 너무나 궁금한데...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위에서 다른 분 말씀처럼 이건 조상신이 도운겁니다. 성인이죠? 근데 자기 연애를 이따위로 끝내고 사라지다니. 그런 부모님이 계셔서 그 남자의 진면목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2년.. 아깝고 아쉬우시겠지만 매몰비용입니다. 욕하시고 울기도 하시고 그리고 털어버리세요. 기운내시고요.
세상에 정말 아픈 경험 하셨네요... 부모도 문제지만 정말 문제는 그 남자다... 진짜 너무 맞는 말이라 뜨끔해요. 이 남자는 아무 문제 없는데 부모가 반대하니까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된 거라고 자꾸 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사실 진짜 본인이 마음이 있었다면 부모님 몰래라도 어떻게든 연락을 했겠죠? 외면하던 진실인데 마주할 때가 됐나봐요. 힘든 경험 이야기까지 해주시면서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어이가 없네요...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으로 봐도~ 전 그냥 천운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집안에 들어가셨으면 작성자님 피를 말렸을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전 작성자님이 하신 생각들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생각합니다. 사랑만으로 현실을 버틸수 없죠~그사랑을 위해서 현실을 더욱 직실하고 대면해야하는거죠 생각이 깨어 있는분은 비슷한 분을 만나셔야 서로가 행복할수 있어요 내가 상대를 바꿔보겠다...정말 어려운거죠!! 이별의 아픔은 잘 이겨내길 바랍니다. 작성자님의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여정이라 생각합니다. 극복할수 있습니다!
상대를 바꾸는건... 제가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했었나봐요.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걸 배웠습니다. 정말 비슷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훨씬 덜 아팠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 사람이 꼭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여정이라니 정말 예쁜 말인 것 같아요. 꼭 극복할게요 감사합니다.
작성자님 같은 사람을 놓치는 게 복을 스스로 차버리는 거라는 걸 그 부모도 모르고 그 남자도 모르네요. 작성자님의 사랑을 받고 기꺼워할 남자 많을 거에요. 어리석은 사람은 사랑할 수록 힘들어지니 여기까지만 하고 끝낼 수 있다는 게 하늘이 도우신 걸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을 바꾼다는 게 힘들고 기대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연애에서는 필수적인 일이 아닌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맞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 남자가 사실 작성자님이 부담스러웠던지 아닌지, 헤어지고 싶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작성자님에게 이제까지 한 태도나 지금까지 연락이 오지 않는 것... 등으로 봐서 그냥 거기까지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 정도의 마음만 가진 사람이라고요. 작성자님 잘못하신거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꽤 흘러서야 이 글을 우연히 봤고 이렇게 댓글 다네요. 지금은 좀 나아지셨나요? 다시 좋은 사람이 작성자님에게 오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