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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불편한 진실
게시물ID : history_40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친Book좌파
추천 : 4
조회수 : 188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4/16 14:24:47
1935년 7월 조선일보가 태평로(현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새 사옥을 짓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은 "조선 사람의 문화 정도가 진보된 상징"(조선일보 1935년 7월 6일자)이라며 기뻐했다. 그는 태평로 사옥 낙성(落成) 축사를 통해 "나는 방(응모) 사장이 많은 금전을 내어서 조선일보를 경영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와 같은 굉장한 건물이 번듯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과연 그이는 거룩한 사업을 하는 훌륭한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축하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만해 한용운과 조선일보는 넓고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만해는 조선일보에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241회에 걸쳐 연재한 장편소설〈흑풍(黑風)〉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조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 〈흑풍〉 연재 예고기사에서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라고 썼다.

만해가 조선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일보 사장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 겸 경성지회장이었던 만해는 역시 신간회 중앙위원이자 평양지회장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의 소개로 계초를 알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섯 살 위의 만해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경한 계초는 1933년 지인들과 함께 성북동 뒷산에 만해의 거처로 '심우장(尋牛莊)'을 지어주었다.

“초대해 주신바 날듯이 달려가겠습니다. 나머지는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만해 한용운이 조선일보 사장 계초 방응모에게 보낸 친필 편지 사본(위 사진). 계초의 초대에 대한 답장이다.만해는 죽첨정(현 충정로) 계초의 집이나 성북동 심우장에서 방응모와 바둑을 두며 시국을 걱정했고, 홍명희와 셋이서 온천에 다녀올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만해는 방응모의 생일을 축하하며 "남산과 한강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하며[祝壽南山漢水上]/따뜻한 봄 삼월 복 많이 받으소서[陽春三月足新禧]"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만해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시를 통해 아픔을 토로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재갈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

만해와 조선일보의 인연은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다. 만해 정신을 이어 '만해축전'을 개최하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조선일보는 1999년 첫 축전부터 공동으로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新聞廢刊   - 신문폐간 (한용운)

筆絶墨散自日休   필절묵산자일휴
  붓이 꺾이고 묵이 흩어져 이날로부터 하릴없이 되었으니

銜枚人散古城秋   함매인산고성추
  말에 재갈을 물리고 사람들은 흩어져 오래된 성에 가을이 들었다.

漢江之水亦嗚咽   한강지수역오열 
  한강의 물도 또한 오열하면서

不入硯池向海流   부입연지항해류
  연지(벼루)에 들지 않고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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