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법으로든지 공부해라"
[오마이뉴스 임두만 기자]1960년대는 초등학교에도 기성회비라는 것이 있었다. 그 전엔 월사금이라고 했는데 3공화국이 들어서고 용어가 기성회비로 바뀌면서 아마 납부도 분기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아마 일년에 한 2000원쯤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 나는 단 한 푼도 그 기성회비를 낼 수 없었다. 6학년 때까지 밀려 있는 기성회비가 5000원도 넘어서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와 교감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께 매달 500원씩이라도 갚다가 장사가 좀 잘 되면 1000원도 갚고 그렇게 졸업 전까지는 무조건 기성회비를 다 갚기로 각서까지 쓰고 가까스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세대 거의 모두가 겪은 쓰라린 삶의 추억이겠지만 이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가난과 배고픔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난과 배고픔의 기억들
'입학원서대 50원 전형료 200원'
초등학교 6학년이던 11월 어느 날 조용히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중학교 어떨게 할 생각이냐?"
"못 가죠 뭐."
"혹시 목포에 아는 사람이나 친척 없니?"
"왜요?"
"이건 순전히 선생님 생각인데 목포에 어떤 사립중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장학생을 50명이나 뽑는단다. 너 정도면 거기 장학생 되겠는데."
"먹구 자는 것은요? 그리고 우리 집안일 때문에도……."
"10등 안에만 들면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문제가 다 해결 된단다. 후회하지 말고 시험이나 한 번 쳐 볼래?"
선생님은 이미 원서를 사 오셔서 작성까지 끝내고 우리 어머니 도장만 받으면 접수시키겠다고 하셨다. 내 공부 욕심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원이라도 없게 시험만 한 번 쳐보겠다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원서에 도장을 찍고 원서대나 전형료 얘기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12월 5일 원서마감 우편접수였기에 12월 2일까지 250원을 가지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250원을 그날까지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12월 2일은 우리 졸업생 특활 발표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그때 기악부에서 작은북을 쳤는데 기악부의 발표회 복장이 까만 교복에 금빛 단추로 광을 내고 모자에 하얀 덮개를 씌우는 것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5남매를 키우시느라 늘 바쁘신 우리 어머니는 아들의 발표회 의상은 전혀 생각밖의 일이어서 나는 그 발표회 복장도 준비하지 못했다. 열세 살 소년이 중학교 원서대 전형료 250원도 준비를 못해 선생님께 부탁해야만 하는데, 그 담임 선생님이 지휘하시는 특활발표회에 의상마저 준비하지 못했으니.
나는 집에서 학교에 간다고 나와서 학교를 가지 못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들로 산으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하고 뛰어다니다가 오후 늦게야 목이 쉬어서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원서접수에 대하여 물어도 목이 쉬었다는 핑계로 어물어물 넘어갔고, 그날 그 후유증으로 열병이 나서 며칠을 앓아누웠다. 그 날로 내 초등학교 생활은 끝났다.
그 며칠 후 친구들 몇 명이 선생님 심부름으로 찾아와서 학교에 나오라고 설득을 했지만 그때까지 나는 기성회비도 아직 3000원쯤이나 밀려 있는데다 원서대도 내지 못했고, 특활발표회까지 망쳐놨다고 생각해 도저히 학교에서 선생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는 방학을 했고, 방학 기간 중에 아이들이 졸업사진 찍는다며 데리러 왔고, 사은회를 한다고 데리러 왔으나 나는 한 번도 그 자리에 가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동네의 친구들이 졸업식을 했다고, 누구는 어느 중학교 누구는 어느 중학교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 줬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들은 나와는 아주 멀어진 이야기였다.
우리 친구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2월 어느 날.
예전 시골 초가집은 여름 장마에 썩어 들어간 지붕의 이엉을 벗겨내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나오는 볏짚을 이용해서 새로운 이엉을 엮고 그 이엉으로 집 지붕을 덮어야 이듬해 여름에 지붕에서 비가 새지 않는다.
겨울이 오기 전에 지붕을 다시 덮어야 했지만 우리 집은 그 해 한반도 남쪽 지방을 휩쓴 한발(旱魃)로 볏짚 벼 한가마도 수확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지붕 덮을 이엉을 엮을 볏짚이 없었고, 새해 2월이 되도록 썩은 이엉을 이고 있었다.
딱한 형편이 안 되어 보였던지 이웃에서 볏짚을 빌려줘서 지붕을 덮으려고 마당 햇빛이 드는 곳에서 이엉을 엮다가 찐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고 있던 때였다. 그 날 갑자기 선생님이 친구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밀린 기성회비를 끝까지 받으러 오신 줄 알고 가슴이 내려앉았으나 태연하게 하던 일을 접고 선생님을 맞았다.
"힘들지?'
"아뇨 괜찮습니다."
"공부는 더 안할래?"
"도저히 형편이 안됩니다."
"이것 받아라."
"……"
"풀어봐라"
초등학교 졸업장이었다. 그리고 해남군 교육청장상, 6학년 우등상, 6년 우등상, 새 국어 대사전, 동아 영한사전, 대학노트 열 권 등의 부상(副賞)들. 선생님의 나직한 말씀이 이어졌다.
"공부해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공부해라."
"……"
"지금 이 가난은 잠시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 가난은 너와 네 후손까지도 이어질 것이다."
"……"
"더 중요한 것은 너처럼 영리한 사람들이 공부를 해서 국가나 사회에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에 아주 큰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
"언제 어디서든 공부를 하다가 어떠한 도움이라도 필요하면 내게 오너라. 내가 큰 도움은 못 주겠지만 힘은 되어주마."
선생님은 그 말을 남기시고 총총히 친구들과 함께 되돌아 가셨다. 그리고 그 해 2월이 다 가기 전에 선생님이 다시 오셨다.
처음 내게 추천했던 그 중학교가 미달이 되어서 추가시험을 보는데 점수가 좋으면 장학생이 된다며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다시 진학 얘기를 하셨고 우리 어머니는 그 선생님의 설득에 감복해, 꼭 장학생이 된다는 약속을 하고 내가 목포의 그 중학교에 시험 치는 것을 허락했다.
목포항의 휘황찬란한 불빛
시험 전날 아침,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 한 시간 쯤 걸어서 해남 가는 버스에 올랐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길이지만 당시에 해남에서는 목포로 직행하는 버스길이 없었다. 면사무소 앞에서 버스를 타고 해남읍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해남군의 서쪽 끝자락에 붙어 있는 산이면 상공리라는 곳까지 가서 또 배를 타고 목포에 가야 했다. 그러나 그 불편한 여행길도 나는 즐거웠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내가 목포항에 도착한 것은 해가 다 넘어간 저녁이었고, 바다의 배 위에서 휘황찬란한 항구의 불빛들을 난생 처음으로 접한 해남 촌놈에게는, 호롱불에 눈 익은 그 깡 촌놈에게는 그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때의 그 기분은 기대하던 중학교 입학시험과 앞으로 내가 헤쳐나가야 할 모든 난관이나 시련 등은 전혀 생각나지 않게 했다. 그저 '나도 저 불빛 아래서 기필코 성공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각오만이 생길 뿐이었다.
시험 결과는 뜻밖에 아주 좋았다. 추가 시험 응시자 120여 명 합격자 74명 중 1등 합격, 입학금 및 수업료 전액 면제. 그러나 기숙사 입소가 어려웠다. 기숙사는 이미 만원이었으므로.
다행히 목포에는 우리 마을에서 시집간 친구 고모님이 당시 목포에서 제법 알아주는 큰 빵집을 하고 계셨고, 그 빵집 공장장이 내 친구의 형이어서 나는 그 형에게 신세를 말할 수 있었다. 고맙게도 그 형은 공장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빵 공장에서 자는 것을 허락했으며, 아침은 팔다 남은 빵 조각으로 저녁은 공장 직원들 틈에서 해결하는 아주 좋은 숙식처가 생기게 됐다.
내 나이 어언 쉰 셋.
나는 한 여자의 남편과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26년을 살아온 중년의 보통 남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언뜻언뜻 내 유년의 날을 뒤돌아보면 초가집 마당 한 켠에서 이엉을 엮으며 가난의 회한과 배움의 열망으로 눈물을 곱씹던 소년에게 나타난 한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분에게 진 빚을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이제 그 분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의 심성으로 봐서, 그 분에게 은혜를 입은 제자가 비단 나뿐은 아닐 것이다. 그 분은 선생님으로 봉직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나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을까? 그 제자들은 지금 다 어디선가 또 나처럼 그 분의 은덕을 그리며 이 땅의 충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한 분의 훌륭한 선생님이 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과연 어느 만큼일까?
스승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2월의 어느 날 가난한 제자를 찾아오셨던 선생님을 떠올리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임두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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