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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12월12일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하나회 소속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의 날입니다.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12,12 사태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장성 및 핵심 영관 장교'들은 동년 12월 12일 공수부대와 사단급 부대들을 동원하여 서울로 진격하는 한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자택으로 습격, 연행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정승화 사령관의 연행을 사후 승인받았습니다.
이후,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3월 제 12대 대통령에 오르는 친일빨갱이군사쿠데타유신독재자 박정희에 이은 야만의 역사가 되풀이 된 것입니다.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으로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은 사건으로 헌정 침탈의 반역의 사건이었습니다.
10·26사건이 일어나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빚어지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거짓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이라며 모종의 음모가 있는 듯이 허위 사실을 만들어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여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고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을 총격으로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게됩니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된 후였습니다.
이와 같은 치밀한 계획아래 이루어진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고 요식행위인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게 되고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만들도록 설득과 협박을 통해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여 대한민국은 제2의 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되었으나 이의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