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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화성, 자수하지않으면 너는 사지가 썩어죽는다 2번째
게시물ID : humorbest_4126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라인베커
추천 : 22
조회수 : 7283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12/01 22:34:21
원본글 작성시간 : 2011/12/01 19: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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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정보 : http://heartbrea.kr/bgmstorage/1035679. "미치도록 잡고 싶었습니다" · 당시 화성의 모습 - 수원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면서 화성은 옛날의 병점 일대와 주변을 포함해 화성군으로 명명됨, 그리고 사건이 주로 발생한 태안읍 일대는 당시에 읍소재 지역으로는 상당히 낙후되었었음 - 읍 지역을 약간만 벗어나면 북쪽을 제외하곤 모두 논밭과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논밭가운데 드문드문 공장들이 몇 개씩 있고 80년대 들어 곳곳에 공장이 들어서며 전형적인 도농의 모습을 보임 - 공장이 들어서며 자연히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고 본래 강간사건이 종종 발생하던 지역이라 해마다 20여 건 안팎의 강간사건이 발생하며 농촌이 도시화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로 대두하기도 함 - 태안읍에는 수인난업도로 남쪽 뒷길에 아담한 크기의 태안지서가 있는데 수사본부가 여기에 설치됨 - 당시 FBI 수사관들처럼 범인의 옷에서 떨어진 섬유올을 분석해 범인을 검거한다는 식의 과학수사는 국내에서 사실상 전무했으며, 많은 강력계 형사들과 베테랑 형사들 대부분이 증거물에 의존한다기 보다는 목격자 탐문수사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로 용의자를 수사 선상에 올려 범인을 검거하는 식이었음 - 물론, 이러한 수사방법은 당시 국내의 범죄자 검거에 특화된 올바른 수사방법이었으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전혀 다른 타입의 화성 연쇄살인사건으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 제1차 이완임 할머니(당시 71세)-1986년 9월 15일 월요일 안녕리 목초지 - 부검 결과 새벽 6시 20분경 일어난 것으로 추정(당시 날씨는 맑았음) - 범인은 인가가 없는 모퉁이 길을 걸어가는 이완임 할머니를 발견, 풀들이 무성한 풀밭으로 끌고 들어가 옷을 벗기고 추행 - 반항하는 피해자를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소지품을 뒤져 돈을 챙김 - 피해자의 다리를 X자 형태로 만든 후 복부에 밀착시킨 점이 특징 - 이완임 할머니가 딸의 집에서 나온 것이 새벽 6시경, 당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을 나섰고 이십분 안에 범인에게 살해당함 - 이완임 할머니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딸의 집에서 10분쯤 떨어진 곳 - 현장에는 사건 당시 피해자의 공포와 두려움을 알려주듯, 피해자의 구역질로 인한 위장의 내용물 일부가 풀밭에 묻음 - 현장에는 질액과 보자기 3개, 붉은 고추, 베지밀병 1개, 고무신, 양말 등(모두 피해자의 것)이 흩어져 있었음 - 피해자의 위장에서 나온 내용물을 통해 독극물 검사 시도하나 특이사항 없었음 - 가을 이슬 때문에 범인의 지문은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 외 흔적들 일절 발견되지 않음 - 현장의 질액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정액 반응에서 음성으로 나오며 성폭행 확인이 불가능해졌으나 추행 이상의 것이 자행되었음을 추측 - 피해자의 질 내에서도 정액 반응이 나오지 않음 - 때문에 딸의 집을 나와 10분쯤 걸어가다 범인에 의해 풀밭에 끌려가 추행하려는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 이후 소지품 확인 후 현금을 챙긴 뒤 날이 밝기 전 그대로 도주한 것으로 추측 - 사건은 동이 트기도 전인 초가을의 새벽 6시 10분-30분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 해당 시간엔 전형적인 우범자들이나 전과자들의 활동시간이 아님 - 당시 사건 현장인 목초밭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태안읍에서 안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안녕리에 위치, 때문에 인적이 드문 초가을의 새벽길을 범인이 범행 대상자를 물색하기 위해(또는 이완임 할머니를 애초에 범행 대상으로 삼은) 걷다가 범행에 나선 것이 아닌, 우연히 현장 부근을 배회(?)하던 중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측 - 경찰은 주변의 우범자들(당시엔 마을을 배회하는 10대, 20대 초반의 불량 청소년들이 대상)을 해당사건의 용의자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활동시간(사건 당일은 월요일)과 인성이 없는 범행으로 볼 때 무리가 따름(당시의 우범자들은 주로 절도, 강도 등의 전형적인 범죄를 저지름) - 물론 반대되는 의견으로 이러한 인성 없이 악의만으로 저질렀을 법한 범행은 인성이 갖추어지기 전인 10대나 20대 초반에 비교적 많은 편이고, 수사과정에서 뚜렷한 용의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범인은 가정에서 아웃사이더인 전형적 우범자들이나 사건 수사 과정에서 추후 가족들에게 의심을 살 만한 가정의 가장이 아닌 홀로 사는 청년, 혹은 중년의 남성일 가능성이 있음 - 때문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공장의 근로자일 가능성 희박 - 당시의 가정 구조상 여성이나 홀로 사는 여성(당시 화성에선 존재 자체가 거의 전무)도 범인일 가능성 희박 · 제2차 박현숙씨(당시 25세)-1986년 10월 20일 월요일 진안리 농수로 - 밤 9시경(날씨 흐림) 수양어머니였던 허모씨의 집을 나서 마을 입구까지 그녀의 배웅을 받은 뒤 버스를 타러 가는 길(1킬로미터 가까운 긴 농수로 둑길)에 범인에게 성폭행당한 후 살해됨 - 당시 날씨가 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린 탓에 사방은 캄캄하고 어두웠으나 멀리 수인산업도로의 지나다니는 차들과 상가의 불빛 때문에 둑길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피해자가 평소 자주 다닌 길이고 둑길이 똑바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 - 범인은 박현숙씨가 당시 마을에서 미인으로 유명했으며 자주 수양어머니 집을 들렀기 때문에 계획성을 갖고 그녀를 목표로 했을 수도 있음 - 하지만 반대의견으로 당시 피해자가 허모씨의 집을 방문하는 사실과 그녀가 허모씨의 집에서 나오는 시간을 아는 이가 없다고 볼 수 있으므로 범인은 애초부터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닐 수 있음 - 일반적인 사건의 경우 계획적인 범행을 저지르는 범인은 현장 답사를 하기 마련, 하지만 해당 범인이 인적 없는 캄캄한 밤중에 마을에서 대로로 나오는 여자를 무작정 기다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움, 이 때문에 당시 피해자가 둑길을 지나 대로까지 나온 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다 범인과 마주치게 되었고 이후 범인의 위협에 의해 사건 현장까지 다시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음 (이 가설의 증거로 피해자의 등에 흉기로 찍힌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함) - 당시 농수로 길을 걸어 큰길로 나오고 있던 피해자와 밤 9시 10분경 마주친 범인은 그녀를 논바닥으로 끌고 가려 했고, 이에 심하게 반항하며 비명을 지르자 흉기를 사용해 그녀의 가슴부위를 찔렀을 것으로 추정(피해자의 시신 가슴 부위에서 드라이버 같은 것으로 네 차례 찔린 상처가 발견) - 범인은 논바닥에서 피해자를 강간한 뒤에 목을 졸라 살해함, 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드물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 농수로(시멘트로 만든) 안에 밀어 넣음 - 때문에 발견 당시 피해자는 농수로 안에 웅크린 자세로 알몸으로 발견됨 - 한편, 당시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는 매우 작았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체형의 피해자였다 하더라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므로, 굳이 이러한 일을 강행한 범인의 범행 마무리 시간은 밤 10시 30분-11시경으로 추측 - 당시 피해자는 범인을 단순한 강간범으로 알았기 때문에 흉기로 위협당했음에도 (칼이 아니었기에) 심하게 반항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에 범인은 그녀의 가슴을 흉기로 찌른듯함 - 피해자 가슴팍의 흉기 자국들로 보아 피해자는 지속적으로 반항을 하였고 이때마다 범인은 흉기로 가슴팍을 찔렀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장 주변에 피해자의 신발이 벗겨져 있던 것으로 보아 피해자가 순순히 끌려간 것이 아니라 심한 반항을 했을 것으로 추측 - 때문에 논바닥으로 끌고 간 후에도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반항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범인은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먼저 목을 졸라 살해한 후에 강간했을 가능성이 농후 - 피해자의 반항에도 입에 재갈이 물리지 않고 손이 결박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차때처럼 먼저 목을 졸라 살해한 후 범행을 이어나갔을 것으로 추정 - 부검 결과 성폭행을 당한 듯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으나 이것으로 혈액형을 알아내는 데는 실패 - 범인은 1차 때처럼 피해자 소지품 중 현금을 가져감 - 현장에서는 질액과 빈 우유팩 2개, 담배꽁초 1개, 모발 6본, 핸드백, 의류, 시계 등이 발견 - 빈 우유팩 2개 중 하나에는 B형의 타액, 또 하나에는 O형의 타액이 묻어 있었음 - 담배꽁초에서도 B형의 타액이 검출, 모발 6본 중 2본은 O형, 나머지 4본은 B형 - 피해자의 혈액형이 O형이므로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일 가능성이 커짐 - 1차 때 범인은 동이 트는 걸 의식해 단순 추행으로 끝내 음모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강간을 한 2차 때에도 범인의 음모는 발견되지 않음 - 좁은 농수로에 피해자의 시신을 굳이 밀어 넣은 것은 당시 그나마 시신의 은폐에 용이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큰길로 이어진 곳에서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의 은폐에 신경을 썼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혹은 범인이 당시 현장 주변 주민의 동선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 작은 농수로에 시신을 은폐한 점과 빈 우유팩 2개에서 두 가지 혈액형이 나왔다는 것은 O형의 공범자가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유류품들이 범인과 관련된 것이라는 전제 조건하에) - 2차 때의 범행 현장은 1차 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므로 1차 때 사건 현장의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화성군, 더나아 주변에 거주하는 범인일 가능성이 컸으나 주변 탐문수색에서 이때까지 뚜렷한 용의자 나오지 않음 · 범인에게서 벗어난 여성의 증언-1986년 11월 30일 일요일 증언자 보호로 정남읍으로만 추측 - 밤 9시경 자신의 집에서 불과 400미터 정도 떨어진 교회에 가기 위해 논길을 걷던 김모 여인(당시 45세)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껴 돌아보는 순간 범인에게 덮쳐지게 됨 - 범인은 김모 여인의 목을 한쪽 팔로 감고 옆구리에는 칼 같은 날카로운 흉기를 들이댄 체 근처 논둑으로 끌고 갔으며, 피해자는 칠흑 같은 어둠에 주위에 아무도 없어 쉽게 저항하지 못함 - 범인은 흉기로 위협해 그녀의 양말로 양팔을 뒤로 해 묶고 거들과 팬티를 벗겨 팬티는 재갈을 물리고 거들은 얼굴에 씌워 얼굴을 가린 뒤 성폭행 함 - 피해자는 거들 틈새로 보이는 범인의 얼굴을 힐끗힐끗 들여다보나 당시 날이 어둡고 상황 때문에 또렷이 기억하지는 못함 - 성폭행 후 범인은 죽기 전에 돈을 내놓으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재갈이 물린 피해자가 웅얼대자 범인은 재갈을 풀어주는 동시에 옆구리에 날카로운 흉기를 들이대며 소리를 지르면 당장 죽이겠다고 위협 - 이때 피해자는 차마 범인의 얼굴을 마주 보지는 못하고 끌려오기 전 논 길에 가방을 떨어뜨렸고 그곳에 돈이 있다고 말했으며, 범인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는 곧장 가방을 찾으러 어둠 속으로 사라짐 - 피해자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용기를 내어 몸을 좌우로 움직여 일어서서는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가방의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칠흑같은 어둠과 이를 미처 예상치 못했던 범인의 손아귀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함 - 피해자의 진술을 따르면 범인은 단독범이었고 거들 틈으로 본 얼굴은 갸름했으며, 머리는 짧게 깎아 마치 방위병 같아 보였고 나이는 25세에서 27세 정도로 보였다고 함 - 또, 160에서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으며 저음의 목소리였다고 함 - 피해자의 증언을 확보한 경찰은 정남읍 일대를 수색해 인상착의와 연령대가 비슷한 용의자를 찾아다녔고, 인근의 모 공군부대의 방위병들 명단과 사진을 확보해 조사에 착수하지만 결국 범인의 검거에는 실패함 · 제3차 권정분씨(당시 25세)-1986년 12월 12일 금요일 안녕리 축대 - 피해자는 남편의 직장 근처인 수원시 세류 2동 모 제과점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밤 10시 30분경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밤 11시경 안녕리 삼거리에서 내려 정수섬유 밑으로 지나가는 작은 도로를 걸어 1백 미터 앞의 집으로 향하다 숨어 있던 범인에게 당한 것으로 추정 - 범인은 피해자를 논바닥으로 끌고 내려가 손을 뒤로 묶은 뒤 스타킹과 거들, 팬티를 차례로 벗긴후 거들과 스타킹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성폭행한 뒤 나머지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 - 이러한 과정이 흉기 없이는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범인은 흉기를 소지했을 것으로 추측 - 또, 거들과 스타킹을 이용해 입에 재갈을 물린 것으로 보아 1차와 2차 때와는 다르게 범행에 대해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것으로 보임, 때문에 1차와 2차의 사례로 범인이 시간에 성적만족감을 느끼는 것이기보다는 범죄 초기의 미숙함에서 점점 발전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음 (물론 2차 때의 경우처럼 죽은 피해자를 강간할 정도로 인면수심이거나 감정선에 공백이 있을 것으로 추측) - 한편, 범인은 동년 11월 30일에 한 차례 범행에 실패(?)하며 피해자를 놓치게 되어 이후 스스로 더 잔인하고 대범하게 범행과정을 진행하게 되는 것으로 추측 - 물론 위의 가설은 1차, 2차, 3차의 범인이 동일범일 때 그 전제가 성립됨 - 피해자의 시신은 논 주인이 논둑을 높이기 위해 삽으로 논고랑을 파던 중 삽 끝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어 흙을 들춰보다 발견함 - 이로 미루어 범인은 피해자의 집 앞 50미터에서 범행을 저지른 후 그곳에 흙을 파 그녀를 묻은 것으로 추정 - 피해자는 스타킹으로 목이 칭칭 감겨 있었으므로 사인은 액살이 아닌 교살로 추정되며, 팬티가 머리와 얼굴 부분에 씌워져 있어 범인이 당시의 단순 강간범들과는 다른 이상심리가 있음을 짐작 - 시신 주변에 떨어져 있던 약간의 모발을 검사한 결과 A형으로 나왔으나, 피해자의 혈액형도 A형이기 때문에 그녀의 모발로 보임 - 팬티에서 정액 양성반응이 나오나 혈액형 판정이 불가능 - 현장에서 발견한 목장갑을 검사하나 범인을 추정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검출되지 않음 - 피해자의 시신이 131일 동안 유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부패의 정도가 너무 심해 부검도 하지 못하며 더 이상의 단서를 찾지 못함 - 사건 발생 현장 역시 1차, 2차 때와 가까운 곳이며 특히 1차 사건 때와 가까운 곳임 - 특히 사건 발생 현장은 피해자의 집에서 50미터 정도, 정수섬유, 동흥제과, 신화기획과 같은 공장들과 연결된 길가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범인이 피해자 주변의 인물이거나 공장과 관련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곳에서 범행을 저지른 측면이 있음 - 비록 피해자의 사인이 스타킹으로 인한 교살이나, 범인은 2차 때처럼 위협의 도구로 흉기를 사용했고 부검이 불가능했던 3차 사건의 경우 흉기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음 - 1차, 2차, 3차 사건 발생 현장으로 미루어 범인은 태안읍 거주로 추측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실제로 태안읍 부근의 상주하는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고 유동 인구가 많았던 만큼 범인은 경기도 도청소재로 인구가 1백만을 넘었던 수원시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음 실제로 태안읍에서 수원 시내까지는 20분도 걸리지 않으며 유흥가가 밀집해 있던 수원역 일대와 수원터미널 일대는 당시에 우범지대로 악명이 높았으며, 조그만 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용의 선상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어떠한 단서도 나오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일 수 있음 - 그렇다면 당시 태안읍이 오산과 수원의 중간에 위치한 탓에 시내보다 외곽에서 농사를 짓거나 목장을 하고 공장에 다니거나, 수원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용의자를 선별하거나 범인을 검거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 · 제4차 이계숙양(당시 22세)-1986년 12월 14일 일요일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 - 피해자는 회사 일을 마치고 오후에 수원 시내 모 다방에서 맞선을 본 뒤 밤 8시 40분경 정남 방면 시내버스를 탐 - 종점에서 내린 피해자는 자신의 집까지 약 1킬로미터 되는 농로를 따라 걸어가다 미리 잠복해 있던 범인에게 근처 논둑으로 끌려가 강간 후 살해당함 - 범인은 굵은 비가 내리는데도 범행 대상자를 물색하며 인가도 없는 농로에 잠복해 있던 것으로 추측 - 당시 사건 현장은 관항천 둑으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음 - 당시 기상 상태와 피해자가 빨간 옷을 입고 있어서 '비 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살해된다'라는 루머가 유포되기 시작 - 범인은 피해자를 논둑으로 끌고 가 블라우스 끈으로 두 손을 뒤로 해 결박했으며, 거들을 머리와 얼굴 부분에 씌운 후 강간한 뒤 스타킹을 이용해 질식사시킴 - 재갈을 물리지 않은 것은 흉기의 위협에 피해자가 일체 반항을 하지 않았거나 당시 굵은 빗줄기와 뜸한 인적으로 범인이 이를 생략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반항이 심해 스타킹으로 먼저 질식사 시킨 뒤 강간했을 가능성도 있음 - 피해자를 살해한 후 현장에 남아 피해자의 우산 손잡이로 음부를 여러 차례 찌르며 난행한 것으로 보임 - 이 때문에 피해자의 처녀막이 심하게 찢겼으며 이 피가 우산 손잡이에 묻게 된 것으로 보임 - 블라우스로 두 손이 결박되어 있는데 시신에 빨간 투피스가 입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블라우스를 벗겨 손을 결박시킨 뒤 다시 옷을 입혀 강간했거나 살해 후 다시 입힌 것으로 추정 - 그 후 범인은 들꺳단 속에 피해자의 시신을 유기시킴 -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을 정밀 검사한 결과 침과 정액이 검출되었으나 혈액형 판별 불가 - 현장에 있던 모발과 음모, 그리고 일부 혈흔도 검사하자 모두 B형으로 확인되었지만, 피해자의 혈액형도 B형이었고 정작 정액에서 혈액을 검출하지 못했으므로 범인의 정확한 혈액형은 확인하지 못함 -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4차까지 오자 관련 이야기가 화성과 수원 등지에 본격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며 지역적으로 엄청난 반항을 불러일으켜 화성 수사본부에서도 4차 사건까지를 토대로 범인 검거에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의정부, 김포, 안양 등지에서 평소 베테랑으로 불리던 형사들 13명의 형사가 정남파출소에서 전담팀을 구성함 - 당시 실종 상태인 피해자를 찾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깻단 주변을 샅샅이 수색한 뒤라 현장 주변은 이미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주변이 온통 풀밭으로 뒤덮여 모발과 음모도 찾기 힘들고 사건 당일 비가 왔기 때문에 현장에서 소득을 얻지 못함 - 현장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피해자가 살던 곳과 주변 인물 등을 집중적으로 탐문수사 하기 시작하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모 여인의 증언을 확보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소득도 얻지 못함 · 제1차-4차까지로 본 범인 - 1986년 9월 15일부터 1986년 12월 14일까지 유일한 생존자 김모 여인 사건을 포함해 총 5건의 범행이 일어남(월, 월, 일, 금, 일) - 범행은 1차 때(새벽 6시 20분경)를 제외하곤 모두 밤 9시부터 10시 사이에 귀가중인 여자를 상대로 이루어짐(역시 1차를 제외하곤 미리 잠복해 있던 것으로 추측) - 피해자들 모두 집 근처에서 살해된 것으로 미루어 범인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잠복한 것이기 보다는 인가 근처 인적이 뜸한 곳에서 잠복하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 - 범인은 1차와 2차에서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11월 30일 사건부터는 먼저 손을 뒤로 묶고 거들을 얼굴 부분에 씌운 뒤 피해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며 2차때 피해자의 반항으로 성폭행 전 살해했던 것을 염두에 둔 듯한 행동을 취함 - 하지만, 이날 피해자가 도망가면서 3차와 4차 범행 때부터는 강간 후 바로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소지품을 뒤져 현금을 가져간 것으로 보임 - 4차 때 강간 후 살해한 피해자를 추가로 난폭하게 추행한 것은 첫 범행 실패후 범인이 더욱 잔인해지고 계획적이며 대담해진 것은 아닌가 추측 (3차의 경우 피해자의 시신이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음) - 범인은 사건에서 모두 피해자의 현금을 가져갔고 김모 여인 사건 때도 현금을 요구하였지만, 인적이 드문 밤중에 언제 나타날지 모를 여성을 기다리며 잠복한 것을 미루어 범인의 가장 큰 욕구는 '절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3차 때부터 피해자의 팬티, 거들, 손수건, 양말 등에서 정액이 검출되거나 양성 반응이 나왔기 때문에 범인이 강간한 뒤에 반드시 자신의 성기를 닦았다는 것을 추정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후 다시 한번 피해자의 소지품에 사정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그럴 정도의 양이었으면 정액 검출과정이 좀 더 용이했을 것으로 보임) - 이로 미루어 범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성기를 닦았다는 것은 살인에 익숙해져 대범한 상태였으며, 시간에 초조해하지도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음 - 또, 범인은 사건 후에 집에 돌아가 부인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을때나 부인에 의해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었을 수도 있음 - 혹은 범인에게 어떠한 결벽증이나 범죄 자체에 대한 결벽증, 또는 편집증이 있었을 수도 있음 - 사건은 모두 농로나 농수로에서 범인에게 습격당해 논바닥, 목초밭, 하천 둑에서 실질적인 범행이 일어났으며, 모두 버스정류장 인근이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벌어진 것임 - 이 때문에 당시 경찰은 범인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추정했으나, 4차 사건 현장의 정류장이 버스 종점이고 피해자가 밤 11시경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던 중 살해되었으므로 사건이 끝나고 시신의 유기까지는 이미 자정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 당시 자정이면 버스가 끊겨 돌아갈 수 없어 정남면 사람이 아니라면 야산이나 들, 또는 여관에서 투숙을 해야 하는데 사건 당일은 비가 제법 왔기 때문에 노숙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정남면은 작은 면 소재지이고 한창 투기바람이 불기는 했으나 숙박업소가 변변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고 근처의 숙박업소에 투숙한다는 것도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부정적임 - 그런데도 범인은 범행 당시 살해 후에 시신을 상대로 추행하는가 하면 벗겼던 겉옷을 다시 입히기도 하고 시신의 유기를 위해 들깻단을 파헤치는 등 이후 행선에 대해 크게 걱정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음 - 특히, 1차 때의 경우 이완임 할머니가 새벽 6시경 집을 나오다 범인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보아 범인이 수원 시내에 거주한다면 수원에서 출발한 시내버스 첫차가 안녕리를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시간이기 때문에 성립되기가 어려우며, 범인이 버스나 택시, 숙박업소를 이용했다면 당시 대대적인 탐문 수사를 벌이던 경찰에 의해 꼬리가 분명히 밟혔을 것임 - 때문에 범인이 버스를 이용한다든지 사건을 위해 버스로 이동해야 할 만큼의 거리에 거주한다는 추측보다는, 적어도 4차 때까지 정남면 부근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 범인은 4차 때 겨울비를 억수같이 맞아가면서도(물론 이때까지는 우산으로 비를 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 차분히 범행 대상을 물색하며 잠복하고 있었고, 피해자를 강간하고 살해하는 데 최소 30분으로 보았을 때 겨울비를 흠뻑 맞고도 이러한 범행을 한 뒤 시신을 상대로 추행까지 하고 겉옷을 다시 입힌 뒤 침착하게 시신을 단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며 주변 들깻단 속에 유기하며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침착함과 대담함, 그리고 강인함을 보여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김모 여인 때와 3차, 4차 때 이미 칠흑 같은 밤중에(당시는 당연히 가로등이 없었기에 해가 지면 논길이 많은 화성군은 말 그대로 칠흑 같았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보일 리 없으며 강간 후 살해할 것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으면서도 거들로 피해자의 얼굴과 눈을 가린 이상심리는 무얼까 - 김모 여인의 증언으로 범인은 단독범, 160에서 170가량의 남자치곤 작은 키, 호리호리한 몸매, 마치 방위병 같은 짧은 머리, 나이는 25에서 27의 20대 중후반, 저음의 목소리, 범행시 흉기로 위협하나 실제로 이를 이용해 살해하지 않고 손이나 피해자의 스타킹으로 살해 - 왜소한 체격이었음에도 여성들을 논바닥에 끌고 간 것이나 피해자들의 특별할만한 반항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범인은 사람의 공포심을 잘 이용했거나 치명적인 흉기를 범행 시마다 소지했음을 추측할 수 있음 - 범행까지의 단계나 범행 직후의 행적으로 보아 범인은 특수부대 출신 정도의 담력이나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범죄성향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 (반대로 당시 시대상에 잔학한 범죄는 비교적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론 동급생의 연극 배역에 불만을 품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동급생과 치정으로 인해 살해한 뒤 자신의 아버지 회사인 소주공장 숙성 탱크에 시신을 유기했던 백화양조 사건, 여성을 강간후 살해한 뒤 손을 이용해 음부를 통해 내장을 꺼낸 상상이 불가능한 범죄사건도 있었다) - 사물을 제대로 식별하기조차 어려운 어둠 속에서 피해자들을 강간하며 거들로 얼굴을 씌웠음에도 마지막엔 살인을 했다는 것은, 범인이 피해자에 의해 경찰에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범행과 살인 자체를 통해 희열을 느끼며 3개월간 5번의 범행, 4번의 살인을 저지른 것이 이를 증명한다 · 제5차 홍진영양(당시 18세)-1987년 1월 10일 토요일 황계리 논바닥 - 밤 8시 15분경 수원시 장안문(북문) 근처에서 친구와 헤어져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태안읍 황계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철길을 건너 좁은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다 범인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 - 범인은 버스에서 내려 800여 미터 되는 벌판의 논길을 따라 집으로 가는 피해자를 황구천 둑 중간의 짚가리 속에서 미리 잠복해 있다가 덮친 것으로 추정 - 범인은 피해자의 양말을 벗겨 재갈을 물리고 브래지어로 양손을 묶은 뒤 성폭행후 스스로 옷을 입도록 하고는 피해자의 털목도리를 이용해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 - 현장 주위에는 모발, 음모, 찢긴 천조각 등이 발견되었고, 시신 부검 결과 정액이 검출되었으며 천조각에서도 정액 양성 반응이 나옴 - 질 속에서도 질액과 정액이 검출되었으나 모두 혈액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혈액형은 판별되지 않았으며, 천조각과 음모 등에서 나온 혈액형은 모두 B형으로 판독됨 - 4차를 제외하곤 5차 때까지의 사건 모두 수사본부가 설치된 태안지서에서 불과 반경 2킬로미터 이내에서 발생했으며, 특히 5차의 경우엔 수사본부에서 현장까지 1킬로미터도 되지 않고 차로는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음 - 범인의 대담성과 범행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현장 지리에 대한 숙지도를 추측할 수 있음 - 홍진영양 사건이 발생하며 거의 일주일간 각종 매체를 통해 주요기사로 보도되며 화성서장이 책임을 지고 교체되는 일이 벌어짐 - 대신 선임 수사본부장에 경기도경 부국장(당시 경무관)이 내정되며 수사요원의 수도 기존 48명에서 63명으로 늘어났고, 태안읍은 매일같이 형사와 기자들의 차량으로 소란스러워짐 - 이때까지 1차 현장에서 반경 7킬로미터에서 모두 발생했으며 그 주변을 샅샅이 수소문하나 어떠한 뚜렷한 단서도 찾지 못함 - 수사팀은 과중한 업무와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 그리고 그보다 주민에게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에 고위 간부건 형사건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지속함 · 제6차 박은주씨(당시 29세)-1987년 5월 2일 토요일 진안리 야산 - 밤 9시가 넘어 비가 세차게 내리자 귀가하는 남편을 위해 마중을 나가던 피해자는, 밤 10시경까지 정류장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범인에 의해 고추밭을 50미터쯤 가로질러 근처 야산으로 끌려 올라가게 됨 - 시신은 상의가 벗겨진 체 목에는 블라우스와 브래지어가 감겨 있고 츄리닝 바지는 다시 입혀진 채로 발견됨 - 사인은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밝혀짐 - 시신발견 전 버스정류장 바로 밑에 있는 논바닥에서 샌들 한 짝이 버려져 있는 것이 발견됨 - 피해자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대로에서 납치되어 야산으로 끌려 올라가 남편이 집에 돌아오고 있는 동안 범인에게 살해당함 - 범인이 피해자를 끌고 야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길옆의 400여 평에 달하는 고추밭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 때문에 빗물로 인해 정확한 문양은 건지지 못하지만, 범인의 족적을 처음으로 얻음 - 족적으로 미루어 범인은 단독범 - 발자국 크기는 245밀리미터를 넘지 않았으며, 발의 크기가 키에 비례한다는 것을 미루어 범인의 키가 170센티미터가 넘지 않는 것으로 추정 - 5차까지의 사건은 태안읍을 정확히 양분하여 통과하는 1번 국도를 기준으로 볼 때 모두 길 남쪽에서 자행되었지만, 6차의 경우 그 반대 방향인 북쪽에서 처음으로 사건이 발생함 - 이로 미루어 범인이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음 - 그동안 비록 수사본부와 가까운 곳에서 범행이 있기도 했지만 모두 오솔길이나 농로에서 범행이 일어난 반면, 6차의 경우 차들이 버젓이 다니는 대로에서 발생했다는 것에서 범인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음 - 범인은 이때까지의 사건에서 피해자의 브래지어나 옷가지로 손이나 발을 결박하는 특징이 있는데, 여기서 매듭을 짓는 방식이 한결같다는 사실이 확인됨 - 이로 미루어 이때까지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더욱 커짐 - 수사본부의 모든 팀은 아침 8시부터 자정을 넘겨서까지 근무에 임하게 됨 - 이때 즈음 모내기철이 겹치며 불신으로 형사들을 잘 만나려 하지 않던 주민들이 이전보다 더 형사들을 만나려 하지 않자 급기야 형사들이 바지를 걷어붙이고 모심기를 거들며 쉬는 시간을 이용해 대화를 시도함 - 다리에 거머리를 잔뜩 붙이고 온 형사들은 이후 주민들이 수사에 최대한 협조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되지만 역시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얻지 못함 - 이 당시 주민보다 경찰과 기자들의 수가 더 많이 보일 정도가 됨 - 파견되어 수사본부의 형사팀장을 맡았던 베테랑 하승균 형사가 결국 수원경찰서로 복귀하게 됨 - 이때까지의 사건으로 미루어 태안, 정남, 병점의 주민 1만여 명 중 범인이 있을 것으로 추측 · 수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김미순양(당시 19세)-1987년 12월 24일 목요일 화서역 논 - 공식적으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측됨 - 피해자는 엎드린 채 두 손이 스타킹으로 묶여 있고 하의가 완전히 벗겨진 채로 발견 - 입에는 팬티로 재갈이 물리고 성폭행 후 스타킹으로 목 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 -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발 및 음모 몇 점이 채취되어 검사한 결과 B형으로 추정됨 - 엽기적이게도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대변이 발견됨 - 범인이 사건 후에 이러한 흔적을 남긴 것이라면, 아마 피해자의 시신을 볏짚 속에 유기한 뒤 태연히 대변을 본 것으로 추측 · 제7차 안기순씨(당시 54세)-1988년 9월 7일 월요일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 - 피해자는 밤 8시 40분경 수원극장 맞은편에서 발안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야산을 넘어가기 위해 양쪽으로 논이 있는 소로를 걸어 소한천을 건너 야산을 넘으려던 중 범인에게 습격당해 미루나무가 있는 위쪽으로 끌려 올라가 살해됨 - 피해자는 수원에서 밤 8시경 버스에 탔기 때문에 가재리에서 내린 시간은 9시 30분쯤으로 추정 -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음 - 사인은 블라우스 끈을 이용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으며 이번에도 피해자의 하의인 쥐색 치마가 다시 입혀져 있었음 - 범인은 성폭행 후 피해자를 살해하고 2개의 복숭아를 먹은 뒤 (혹은 칼로 잘라) 9조각의 복숭아를 피해자의 질 내부에 밀어 넣음 - 한편, 이때까지 주로 태안읍을 경계로 이루어졌던 사건이 주변 순찰의 강화때문인지 태안읍에서 수원역을 거쳐 무려 29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발생함 - 때문에 모방범일 가능성에 대해 말이 있었지만, 피해자 손을 묶은 매듭과 세세한 범행수법의 일치로 미루어 범인이 본격적으로 활동 무대를 넓힌 것으로 잠정 추정 - 6차 사건 후 경계가 강화되자 7개월 만에 참지 못하고 수원 화서동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또다시 참지 못하고 9개월 뒤 팔탄면까지 가 범행을 지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음 - 7차 사건을 계기로 화성서장이 다시 교체됨과 함께 경찰청 (당시 치안본부)에서 서울 출신 최중락 총경을 수사본부에 파견 - 경찰청에서는 화성 수사본부에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국무총리와 여야의 당 대표들이 수사본부를 직접 방문해 형사들을 격려함 - 화성 수사본부는 요원을 114명으로 더욱 확대해 운영하게 됨 - 다시금 수사에 참여하게 된 하승균 형사가 현장 근처 풀밭에서 유독 어느 한 곳만 풀들이 양옆으로 길게 누워 있는 것을 발견 - 다른 형사들과 동네 주민들이 해당 풀들을 지나간 적이 없다고 하자 범인이 사건 당일 무겁게 이슬을 머금은 풀들을 헤치고 지나가 풀들이 양옆으로 쓰러진 것이라는 추리를 함 - 한마디로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현장에서 불과 2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버스길을 제쳐두고 풀밭을 헤치며 400미터 정도 되는 길을 택한 것은 신분의 노출을 우려한 점과 이 때문에 지방도로가 있는 곳까지 가서 수원행 버스를 탄 것으로 추리 - 결국, 범인은 집 근처 정류장에서 밤 9시 30분쯤 내린 피해자를 습격당한 뒤 밤 10시를 전후로 수원-발안 간 지방도로를 지나는 수원행 버스에 탔을 것으로 추정 - 하승균 형사의 추리대로 탐문수사 결과 당시 범인을 태운 것이 유력시되는 버스기사가 등장 - 당시 버스기사는 사건 현장에서 400-500미터 지난 논길에서 겉옷을 왼쪽 손에 든 젊은 남자를 태움 - 그리고 이슬을 머금은 풀밭을 헤친 듯 남자가 운동화와 무릎까지 젖어 있는 것을 목격 - 남자는 24-27세가량으로 보였으며 머리는 스포츠형에 갸름한 얼굴, 165-170cm의 키에 보통체격, 코가 오똑하고 눈매가 날카로우며 구부정한 모습에 검은색 전자손목시계, 시계 밑 문신(혹은 점), 우측 새끼손가락의 봉숭아 물, 둘째손가락에 있는 물린듯한 흉터가 있었다고 함 - 이를 기반으로 작성된 몽타주는 그 신뢰도 면에서 믿음직스러운데, 그 이유는 목격 하루 만에 버스기사와 안내양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 - 이후 이 두 사람을 한 달 동안 수사팀에 합류시키며 그에 따른 보수도 지급 - 이들은 수사팀이 고등동과 화서동 동사무소에서 촬영한 25세-35세 사이의 남자 주민등록증 사진을 범인과 대조시킴 - 이어 수원 시내 25개 동사무소와 화성시 태안읍 등 15개 읍사무소에서 25-35세까지의 남자를 모두 촬영해, 그 중 5만여 명을 이들에게 대조작업시키나 범인 검거에 실패 · 제8차 김미정양(당시 14세)-1990년 11월 15일 목요일 병점리 야산 - 마지막 사건이 있은 지 24개월 만에 병점리 야산에서 사건이 발생함 - 오후 6시 30분경, 같은 반 친구 이모양과 병점초등학교 앞 지하도에서 헤어진 뒤 실종 - 학교에 가거나 귀가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소나무가 길 양쪽에 빽빽하게 들어선 400여 미터의 오솔길에서 범인에게 습격당한 것으로 추정 - 해당 길은 대낮에도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없어 성인 남자도 주위를 한번쯤 돌아볼 정도의 으슥한 길이었으며, 폭이 좁고 구불구불하기까지 했음 - 해당 길의 약 7년생 된 낮은 소나무 밑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시신은, 멀리서 보기엔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활처럼 휘어 있었다 - 피해자는 하나의 스타킹으로 손과 발이 뒤로 묶인 상태라 몸이 활처럼 휜 상태였으며, 다른 한 짝의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추정 - 범행 현장은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 의경을 배치하던 곳이었는데, 범인은 이를 미리 파악하고 그전에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 범행 대상을 물색한 것으로 보임 - 범인은 평소 의경의 배치 여부와 그 시간대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김미정양의 귀가 시간까지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나 라는 추측도 등장 -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범인은 피해자의 손과 발을 동시에 묶었으며 양쪽 젖가슴에 20회 정도 얇게 베인 상처가 나 있었음 - 또, 질 내부에서 볼펜, 포크, 수저 등이 발견됨 -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 후 소지품을 뒤져 여러 가지 물건을 음부에 깊숙이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 - 24개월 만에 범행을 지르며 그동안 쌓였던 욕구를 한꺼번에 터뜨린 것으로 추측 - 또, 그 어느 때보다도 오랜 시간 피해자를 희롱한 것으로 추측됨 - 한편, 도시락통 뚜껑에서 용의자 검거 시 대조 가능한 지문 1점을 발견 - 피해자 교복 상의에서 검출된 정액으로 혈액형이 B형이라는 통보를 받음 - 특히, 범인이 흘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중 흰 머리카락 한 개를 발견 - 때문에 범인이 피해자의 손과 발을 한꺼번에 묶은 점과 면도칼로 젖가슴 부위에 상처를 낸 점, 발견된 흰 머리카락으로 인해 노인이 모방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냐는 추측도 등장하지만, 동일범의 소행일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림 - 범인은 2차 때 피해자의 지갑 안에 있던 손톱깎이를 이용해 상처를 낸 점과 8차에서 피해자의 면도칼을 이용해 상처를 낸 것은, 치명상이나 살해 목적이 아닌 피해자의 공포심 유발을 위한 것으로 추정 - 이즈음 수사본부에서는 사건 발생 예상 지점에 여경을 밤늦게 보내어 인근에 땅을 파 형사들을 매복시키며 함정수사를 펼치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음 - 이로 미루어 범인은 당시 전경들의 배치 모습 등이 보도되던 언론과 매스컴의 보도를 충실히 확인하고 있으며, 수사본부의 진행 상황과 관련해 여러 각도로 계산하며 범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추정 - 유력 용의자 검거 소식이 공개되면 조심하며 범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양 범행을 멈추지 않는 것을 근거로 홀로 수많은 경찰들과 대적하고 있다는 데서도 흥분을 느끼는 것은 아니냐는 가설도 등장 · 제9차 권순상 할머니(당시 69세)-1991년 4월 3일 수요일 반송리 야산 - 4월 4일 아침 9시 30분경, 전날 밤 9시경 동탄면 오산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반송리에 있는 집을 향해 있는 400여 미터의 좁은 밭길을 걸어가던 중 범인에게 습경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집을 불과 150여 미터 남겨두고 살해된 체 발견됨 - 사건 현장은 화성 수사본부와 상당히 거리가 먼 곳이며, 이 일대에 유사 사건 발생도 전무해 수사팀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였음 - 게다가 현장에 배치될 만큼 많은 경찰력이 없었으며 반상회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밤길 외출을 삼가고, 불가피할 시 가급적 두세 명이 함께 다닐 것을 권하는 정도였음 -때문에 8차 때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미리 치밀하게 조사한 것으로 추측 - 범인은 피해자를 검은 천으로 두세 차례 목을 감아 질식사시킨 것으로 추정 - 범인은 피해자를 성폭행 후 질식사시킨 뒤, 질 내부에 피해자의 양말을 넣은 것으로 추정 - 질 내부에서 꺼낸 양말을 검사해 본 결과 정액 양성반응을 보였고 혈액형은 B형으로 나옴 - 화성 수사본부에 비판적인 여론이 들끓게 되고 지휘부에서 화성 관내에 경찰력을 보강하기에 이름 - 화성 지역에 상주할 기동대 1개 중대 보강, 태안읍에 파출소 1개소 증설, 태안읍을 비롯한 마을로 진입하는 주요 길목과 오솔길에 초소를 세우고 매일 밤 3개 기동중대가 2인 1조로 방범 근무 - 초소 수는 무려 180여 개에 달하게 됨 - 하지만, 5년간의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장기수사에도 불구 범인 검거에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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