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내가 그대를 사랑함을, 한없는 그리움으로 바꾸면서 영원한 사랑이 되었다.
I'm ok.
-1-
괜찮다. 커피는 달았다. 설탕도 프림도 넣지 않은 커피는 의외로 괜찮았다. 달았다.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담배를 다 피우기도 전에 커피를 다 마셨다. 꽤 많이 걸었다.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깍두기만으로도 술을 마셨다. 괜찮다. 멋진 바에서 멋들어지게 위스키를 마시지 않아도 젠틀한 세심한 바텐더 대신 낡은 포장마차와 함께 세월을 보낸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시는 술도 괜찮았다.
"젊은이 괜찮아?"
"괜찮아요."
웃었다. 괜찮다. 응, 괜찮다. 웃을 수 있으면 괜찮은 것 이다.
'그럼, 웃을 수 있다면 괜찮은 거야. 웃지 않고 울기 만해도 살아 는 있잖아요? 그런데 웃을 수도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죠.'
어쩐지 옆에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웃어 줄 것 같은 여자가 떠올랐다.
괜찮다. 괜찮아.
술은 딱 세잔만 마셨다. 정확히 세 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락을 했다.
"복귀 하겠습니다."
[괜찮아,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
"괜찮습니다. 근처 입니다."
[술 마셨나?]
"딱 세 잔이요."
내가 대답했다. 잠시 너머에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딱 세잔?]
"네, 딱 세잔이요."
[들어와서 휴게실에서 대기하게.]
"네."
포장 마차에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병원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누구하나 내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휴게실에 들어가자 과장님이 가운을 벗어 던지고 과자와 소주를 몇 병 사들고 앉아 있었다.
"세잔으로 되겠어?"
과장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과장님이 웃으며 내게 앞에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과장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의사는, 딱 세잔만 하는 거라고."
내가 말하자 과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2-
인턴 생활 중이었다. 바쁘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첫 수술에 당직으로 들어갔을 때 였다. 더군다나 병원 내, 아니 전국으로 유명한 흉부외과의 '이 현택' 과장님의 집도였기에 나와 함께 들어가는 의사와 인턴들 모두가 긴장했다. 너무 긴장해서 메스를 한번 떨어트리는 실수까지 범했지만 과장님은 긴장 풀라며 기나긴 대수술을 무사히 끝맞쳤다.
유명 제벌의 딸이었던 이번 수술 환자는 과히 완벽하다고 좋을 정도로 수술을 성공리 마치어 회식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 과장, 한 잔 더 받지?"
원장님이 과장님에게 술을 권했을 때였다. 과장님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딱 세잔만 받습니다."
약간 건방지다고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원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랬지 참. 내 정신 좀 보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궁금증이 들었다. 같이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민망한 장소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왜 술을 세 잔만 받으시는 거죠?"
"나는 술 세 잔이 딱 좋아. 난 술을 많이 마시면 다음 날 손이 떨리거든. 혹시 자네도 그러면, 술은 딱 세 잔만 하라고."
"아-"
"아무리 슬퍼도, 짜증나도, 화가 나도 딱 세잔. 의사가 그 날 슬프거나 짜증나는 일 있어서 술을 왕창 마셔서 다음 날 응급 환자 집도를 못하면 환자 하나는 죽는 거 아닌가? 하루의 기분탓에 누군가 죽게 만들면 그건 돌팔이지."
과장님은 말을 하고 손을 씻고 나갔다. 딱 세 잔.
그 이후로 나는 술을 딱 세 잔만 마시게 되었다.
-1#2-
"괜찮나?"
과장님이 술을 내게 따르며 물었다.
"네."
술을 받아 들고 가만히 잔을 내려놓았다. 과장님이 인상을 썼다.
"마셔."
"요새 직장 상사라도 강제로 술을 권하는 것은 좋지 못한 주류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셔."
과장님이 다시 엄하게 말하자 결국 술을 들이켰다.
"쓰냐, 안 쓰냐?"
문득 과장님이 물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둘 다 내일 쉬자."
"그래도,"
"우리 병원의 의사 많다."
과장님은 말하며 같이 술잔을 비웠다. 다시 잔을 따랐다. 주량이 세지는 않다. 그런데 어쩐지 술은 자꾸만 들어갔다.
괜찮았다.
-3-
인턴 딱지를 땠을 때 정신이 없었다. 바쁜 인턴에서 벗어나서 좀 한결 낫겠다고 생각도 잠시였다. 신경 써야 할 것, 기어오르는 인턴들, 무시하는 수간호사, 밀어 닥치는 책임감- 정신없이 받아내고 견디어 내면서 한계에 이르렀다.
옥상에 올라 담배를 물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죽겠네.”
나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의사 선생님, 죽겠네- 죽겠네- 하면 진짜 죽어버려요?"
어딘가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한 여성이 옥상 위 수조 탱크 위에 올라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환자복도 아닌, 일상복이었다.
“누구세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저긴 어떻게 올라 간 거지? 올라갈 사다리도 계단도 없는데 용케 올라간 여자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늘 입원할 환자입니다."
"아, 그래요?"
사교성이 지나치게 좋은 여자였다. 여자는 웃으면서 아예 들어 누워버렸다.
"아, 저기요~ 거기 그렇게 누우시면 안 돼요.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내가 누워버린 여자에게 소리쳤지만 여자는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무시하고 누워있었다. 어떻게 올라 간 거야?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지며 어떻게든 올라가서 끌고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보지만 올라갈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내려오세요!"
내가 소리치며 계속해서 올라갈 방법이 어디 있나 찾아보는데 문득 내 눈 앞에 손이 보였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올라오시게요?"
여성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붙잡았다. 손을 붙잡고 거대한 수조 통을 보니 발을 디딜만한 곳이 보였다. 발을 디디고 올라갔다. 높았다. 높은 위치에서 주위 빌딩, 병원보다 낮은 건물, 길거리, 가로수 길-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장관에 깜짝 놀랐다.
"오늘은 아래 보단, 위가 더 멋있어요."
다시 드러누운 여성이 말했다. 하늘을 봤다. 파랬다. 8월의 하늘은 파랬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있는 8월의 하늘은 파랬다.
나도 모르게 같이 누웠다. 하늘을 보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죽겠어요?"
"아니요."
웃음이 났다. 어찌어찌 살 수 있을 것 같다.
-4-
쇼크였다. 검진 차트를 쭉 보면서 환자 사진과 이름을 다시 확인해 보지만 믿을 수가 없다.
"이번에 새 담당자 차트 확인 됐나?"
과장님이 내게 물었다. 멍하니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명도 확인했다. ASD.
"ASD. 확인했습니다."
과장님을 보고 대답했다.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마음 주지 말고."
과장님이 나갔다. 사진과 이름을 확인했다.
"선생님, 환자 들어갑니다!"
"네!"
대답하자 방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올해 25세.
여자가 눈을 깜박였다.
"어! '죽겠네' 선생님?"
"네?"
벌써 내 별명을 지은 올해 25세, 이시연.
"제 담당이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가 내 앞에 앉았다. 올해 25세, 이름은 이시연, 병명은 ASD.
"어때요? 죽겠어요?"
여자가 물었다.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올해 25세, 이름은 이시연, 병명은 ASD - 심방 중격 결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 질환은 1세 때 미리 발견하고 치료를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대다수는…….
"죽겠나보죠?"
여자, 시연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차트를 보여주고 스크린을 보여줬다. 한참을 일단 아는 대로 중얼중얼 내뱉었다.
"그러니까, 죽어요 살아요?"
시연이 다시 물었다.
"글쎄요?"
시연이 내 대답에 웃었다.
"일단, 지금은 살겠죠?"
"네."
"그럼 됐네! 나, 커피가 마시고 싶었는데 마시지 못하면 어떻하나 걱정했거든요."
시연이 웃으며 말했다.
“커피 좋아해요?”
"아뇨, 네. 좋아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은?"
"괜찮아요."
시연이 웃으며 밖에 나가 자판기에서 싸구려 블랙커피 두 잔을 뽑아다가 내게 하나 건넸다. 사실은 커피는 못 마신다. 더군다나 블랙은 정말 싫다. 애써 마셨다. 환자와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쓰다. 역시 맛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음료를 전 세계 사람들이 마시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마시면서 의문이 들었다.
호호- 불며 정말 좋아하는 듯 맛있게 마시는 시연을 보면서 또 한 가지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도무지 내게는 커피를 마시는 전 세게 사람들만큼이나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3-
과장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쓰냐?"
"별로요."
이미 많이 마셨는데도 술은 쓰지가 않다.
"술이 안 쓰면 어떻게 하냐. 술은 원래 쓴 건데."
과장님이 중얼중얼 거렸다.
"괜찮아요. 많이 드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과장님이 자리에 거칠게 앉혔다.
"무슨 마시기는! 마셔!"
다시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을 얼마나 사왔는지 아직도 몇 병은 남은 게 보인다. 다시 술을 들이켰다.
"안 쓰면 어떻게 하냐- 안 쓰면 어떡해- 응?"
-4-
이 여자는 의문투성이다. 뜬금없이 병원 마당에서 쭈그리고 앉아 개미 행렬을 보면서 혼자 '개미들아, 옆 보석 집에서 하나씩만 물어다 나한테 주면 안 돼?' 하고 사정을 하지 않나, 개와 대화를 시도하던가, 꽃에 이름을 붙이고 아침 밤으로 대화를 하고.
주변에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과도 대화를 잘 하는데 사람을 넘어서서 주변에 사물들과도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상황은 나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링거야, 얼른 몸에 들어오라니까~ 나 이제 지겨워. 내가 그렇게 좋아? 나 붙잡고 놓아주기 싫어? 나 이렇게 안달 나게 할 거야, 응?"
이 여자, 시연은 그러니까- 지금은……. 링거를 쳐다보면서 약물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
약물과 대화 시도. ASD 증상이 뇌에 이상을 일으키기도 하던가? 머릿속으로 의학 지식을 생각해보지만 그런 기억은 없다. 몰라, 어딘가에서 관련 보고서라도 하나 있을지도.
"죽겠네 샘!"
나를 보고 반갑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시연이 부른다. 해맑은 그 미소는 도무지 20대 중반에 여인의 느낌보다는 10대 소녀 같은 미소다.
"네. 시연씨."
근처 옆 자리에 앉았다. 시연은 정말 기분 좋은 듯 흥얼흥얼 거리며 내 '주제가'를 흥얼거린다.
"죽겠네~ 죽겠네~ 아주아주 죽겠네~ 왜요 왜요~ 왜 그리 죽겠나요~?"
……명곡도, 명창도 아니라 솔직히 듣기 창피하다.
의문투성이다. 이제, 이 여자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해부라도 해보고 싶을 정도로 의문이 치밀어 오른다.
"왜 또 그리 인상이에요?"
시연이 나를 보고 묻는다.
"별로요.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네요."
"나만 보면 인상이잖아요?"
그랬나? 하긴, 볼 때마다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다.
"몸은 괜찮아요?"
의례적인 질문을 한다.
"에이,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그러면 시연은 툴툴 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범상치 않은 대답을 한다. 처음에는 놀라서 어디가 어떻고 혈압은 어떻고, 체온은 어떻고 CT를 하고 난리를 쳤지만- 한 달 즈음 지나니 이제 적응이 되었다.
"오늘은 안 멈출 거예요."
내가 말하고 차트에는 컨디션 정상이라고 표시한다.
"믿어요."
시연은 나를 보고 웃는다.
의문투성이다. ASD.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고, 언제 발작이 들이 닥쳐 고통의 시간을 보낼 지도 모른다. 아마, 이 여인은 어려서 부터 지금까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사신의 손길, 고통스러운 발작의 연속을 보내 왔을 것 이다. 걷는 그 걸음걸음 유리 길을 걷는 듯 조심스럽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생명을 천문학적인 확률로 지금까지 견디어 온 것이다.
지쳤을 것 이다. 나 같으면 지쳐서 이제 좀 죽여 달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는다. 이 여자는 정말 그냥 보기에는 도무지 죽음과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룹에 하나에 속했기보다는 평생도록 장수할 사람들의 그룹에 속한 사람 같다.
의문투성이다.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어, 다 됐다."
시연이 말하며 나를 쳐다본다.
"다 됐다, 그죠?"
"……?"
그 말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링거가 다 떨어져 있었다. 잠깐, 분명 링거가 반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 여기 도대체 얼마나 있었던 것이지? 그냥 멍하니 시연만 쳐다봤는데? 졸았던 것 일까?
"아, 이거 좀 풀어달라고요~"
"그건, 간호사가……"
"죽겠네 샘이 해주세요, 네?"
나를 보며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 고집불통의 사람 생각 안하고 곤충과 동물과 사물과 자연체와 대화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의문스러운 4차원 여자의 팔을 잡고 링거 주사를 뽑고 알콜 솜으로 상처를 문질러 줬다.
"행복, 행복!"
시연이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어요?"
"그냥. 죽겠네 샘이 링거 주사 빼 주고, 또 그냥…… 순간순간이 기분 좋지 않아요?"
시연이 당연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순간순간이 기분 좋다고? 그거 조증 증세 아닌가?
"그렇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순간순간.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 웃음이나요. 아, 살아있구나. 살아있어."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며 심장의 울림을 듣는 듯 시연은 가히 성스러운 성모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증 같은 게 아니었다.
이 여자는, 내가 당연히 살아갈 1초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1초일 수도 있었고 내가 당연히 살아갈 1분이 영원히 오지 않을 1분일 가능성도 있다.
순간순간 살아가는 게 이 여자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심장이 뛰었다.
갑작스럽게 내 가슴에 손을 갖다 대는 시연에 손길에 나도 모르게…….
"건강하네요. 오래오래 살겠다."
시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응, 그니까 웃어요. 괜찮아요, 살아가다보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 그러니까 웃어요."
-1#4-
괜찮았다. 웃었다. 웃었다. 괜찮았다. 어떻게든 될 테니까…….
술을 들이켰다. 쓰지 않다. 쓴 것은 죽을만큼 싫고 못 먹는데. 왜 이리 쓰지가 않지. 왜 쓰지 못한 거야?
난 괜찮은데 말이다.
술의 취한 것일까? 사고 진행 방식이 이상하다.
"괜찮냐?"
"……네."
술을 들이켰다. 과장님이 담배를 물었다.
"괜찮냐?"
"……네."
잔의 술을 따랐다.
"괜찮냐?"
"……네."
들이켰다.
-5-
이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다.
이 여자는 순간순간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의외로 깊은 생각을 가진 존재이기도하다.
그런데……
"으으으으-"
주사와는 대화를 못 하는지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냥 기분 좋게 한 대 맞죠?"
내가 말했지만 시연은 고개를 젓는다.
"감기 예방 주사에요. 감기 걸리면 고생이잖아요."
"감기는!"
뭐라고 반론을 할 때 살짝 옆의 간호사들에게 눈치를 주자 눈치 채지 못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격하게 소리쳤다.
"수많은 바이러스가 있어서 예방 주사 따위 사실 별로 도움도 되지 않……!"
"GO!"
내 외침에 주위 간호사들이 양 팔을 잡았다.
"아!"
시연이 외칠 사이 빠르게 팔을 걷어 주사를 넣는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시연이 계속해서 외치지만 이미 처음 '아파' 라고 할 때 이미 주사는 다 놓고 뺀 상태다.
"이미 끝이에요."
내가 말하자 시연이 눈을 깜박인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 내민다.
"애도 아니고 도대체 주사가 왜 싫은데요?"
"그냥. 어릴 때부터 무서워서 지금도 무서워요."
시연이 내 질문에 생각을 삼초간 하다가 내게 대답한다.
그래, 이 여자는 어려서부터 주사와 싸우면서 살았겠구나.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 가슴이 지끈 거렸다. 정을 주지 않는다. 환자에게 너무 많은 정을 주는 것은 후일 의사에게 큰 고통으로 작용될 수 있다. 그러니 사적인 감정은 금한다.
알고 있다, 상기하고 있다.
"그렇군요."
말을 대충 받고 밖으로 나왔다.
정신없이 일을 할 때였다. 점심 시간 간호사 한 명이 내게 달려왔다.
"시, 시연 환자가 사라졌어요!"
……또?
인상이 절로 써졌다. 이 세상 모든 자연체, 사물과 대화하지만 주사와는 대화 하지 못하는 여자가 갔을 만한 공간은 예상이 갔다.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수조 탱크 위.
"시연씨."
역시나 이 여자는 수조 탱크 위에서 늘어져있다. 잠든 고양이처럼 무방비하게 늘어진 여자는 내 불음에 고개를 움찔하고 내게 돌렸다.
"죽겠네 샘."
나를 발견하고 미소 짓는다. 혈색과 동공을 살펴보지만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좀 있다가 들어갈까? 수조 탱크 근처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자 시연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고 수조 탱크를 올라 시연의 옆에 누웠다.
"좋죠?"
시연이 말했다. 시연의 목소리와 동시에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떠다니는 구름은 오전 내내 지독하게 바쁘게 뛰어 다닌 내
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여유롭다.
여유롭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좋네요."
"헤헤."
내 대답에 만족한듯 시연의 웃음 소리가 귓가에 재잘거린다. 살짝 고개를 돌려 시연을 쳐다보니 미소를 짓고 있다. 웃는게 예쁘다, 이 여자.
흥얼 흥얼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번엔 자작곡이 아닌 것 같다. 전주를 혼자 중얼 거리다가 대충 앞 가사를 뭉개버리며 진행하다가 아는 부분인지 큰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요들레이 요들레이 요들레이 요들레이요~! 요들레이요들레요들레이 요들레이 호호~!"
……어디서 들어봤나 싶더니 요들레이 송이었구나!
"푸, 하하하-!"
이번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으응? 왜 웃어요!"
“아아~ 갑자기 무슨 요들레이 송이에요?”
내가 묻자 시연은 입술을 삐줄 내밀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 그럼 요들레이죠!"
"네, 네."
자신만의 세계와 법도가 있는 여자다. 다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있죠."
"네."
부르자 대답했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는거에요?"
의문을 물어봤다. 시연을 쳐다보자 시연이 눈을 깜박였다.
"흐응~ 그냥."
시연이 대답하며 몸을 돌려 하늘로 향했다.
"죽는다는게…… 무섭죠. 근데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 알아요? 또, 사람이 죽을 때-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 누군가가 태어난다는 말도 있고."
시연이 두서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때, 누군가는 태어나요. 대단하지 않아요?"
시연이 나를 쳐다봤다. 초롱초롱하게 빛이나며 처음으로 불을, 바다를, 별을, 고목을, 생명을 마주한 어린 아이같이 빛이나는 그 눈동자는 심장을 두근 거리게 만들었다.
"또 내가 죽을 때 별이 탄생하는거에요! 그 별에는 이 지구만큼이나 많은 생명이 있고요."
시연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입가엔 생생하게 미소가 감돌고 있다. 감사하는듯, 즐거운듯 미소 짓는 시연은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을 보는 것 같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래서 웃을 수 있다고?
멍하니 시연의 얼굴을 쳐다봤다. 시연이 나를 보고 웃는다.
"정말,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짜증 섞어서 시연을 보며 물었다.
"네."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이 났다. 죽는게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어째서 인지 시연이 죽는다는 것에 무덤덤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정말요?"
내가 다시 묻자 시연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있잖아요, 의사가 그렇게 환자 닥달하면 안 되지 않아요?"
시연이 문득 내게 물었다. 아차 싶었다. 시연의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괜찮아요! 이렇게라도 생각 안 하고, 내가 죽은 다음에 아무 것도 이 세상에 남지 않으면……그건 내가 너무 초라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시연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라도 믿고 괜찮아질래요.”
잦아드는 중얼 거리는 목소리로 시연이 대답했다.
살리고 싶다.
이렇게 살리고 싶은 환자는 새내기 의사였던 내게 처음이었다.
-1#5-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래."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과장님이 대답했다. 그런 것 같다. 어지럽다. 반고리관의 장애로 몸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팔로 머리를 받치고 술을 들이켰다.
"과장님, 저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저."
"그래."
과장님이 다시 담배를 물었다.
"과장님.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
술을 따랐다. 들이켰다.
"저,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요, 저."
"그래."
눈물이,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6-
인공 심장 이식 수술. 과장님과 함께 집도를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
환자명 이시연. 병명 ASD.
"괜찮아요?"
수술에 들어가기 전 시연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시연이 말했다. 시연이 문득 자신의 가슴에서 손을 때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괜찮아요?"
"네."
"심장이 이상하게 뛰나요?"
시연에게는 특히나 위험 부담이 큰 수술이었기에 조금에 이상이라도 있으면 큰 이상이 생길 수 있어 물어봤다. 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 있으면- 지금까지 아픈 몸으로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준 애랑 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시연이 미소 지었다.
"자기 신체와도 대화 할 수 있었나요?"
"당연하죠."
시연이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나를 사로 잡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환자에 긴장을 풀어줘야하는데 도리어 환자에게 의사가 긴장이 풀리다니. 역시나 아직은 멀었다.
"있죠."
시연이 문득 나를 불렀다.
"네?"
내가 대답하자 시연이 웃었다.
"선생님 탓 아니에요. 과장님 탓도 아니에요. 그죠?"
의아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죠?"
대답을 강요하는듯 인상까지 쓰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제야 시연이 미소지었다.
"하지만 선생님 덕이고, 과장님 덕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
"깨어나면 말해 줄께요."
시연이 내 물음에 미소 지었다. 문득 시연이 내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가까이 다가서자 시연이 내 얼굴을 쭉 잡아 당겼다.
입술과 볼 사이.
시연의 입술이 다가왔다.
부드러운 감촉에 내 눈이 커졌다. 시연의 새하얀 얼굴이 지근거리에서 보였다. 순간 멍하게 있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또 깨어나면, 입술에 해줄께요."
시연이 미소지었다.
"……흠. 장난은……여기까지 하죠."
얼굴이 뜨거웠다.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시연에 중얼 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 아닌데."
방을 나섰다.
수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술대의 들어가기 전 시연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살린다. 꼭! 꼭, 살린다.
마음을 먹었다.
수술실의 불이 들어왔다.
다시 불이 꺼졌을 때는…….
…… 모두가 짐작할 만한 이야기다.
-1#6-
귓가의 그녀의 속삭임이 들린다.
때로는 부드럽게
'괜찬아요.'
"으흑…… 으흑……."
때로는 쾌할하게
'괜찮아요!'
입을 다문다. 입술을 깨물었다.
때로는 다부지게
'괜찮아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죄책감과 내 자신의 무능력감과 내 자신의 부족함에 치가 떨렸다. 가장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지 못했다. 가장 살리고 싶은 것을 살리지 못했다.
도대체……나란 인간은 뭐란 말인가. 도대체가 한심함에 죽고 싶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위해 기나긴 시간을 투쟁해왔는지 모르겠다.
정작 구하고 싶고 살리고 싶은 것은 살리지를 못했는데.
테이블의 머리를 박았다.
이럴 때면 그녀는 아마, 장난 스럽게 웃으면서 내 팔에 매달리며 말하겠지.
'괜찮아요, 괜찮아요!'
눈을 감았다.
'응, 그니까 웃어요. 괜찮아요, 살아가다보면 어떻게든 될테니까- 그러니까 웃어요. OK? OK?'
어, 그래. 알아요. 알아요, 시연씨.
"yes, I'm ok."
나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과장님이 나를 쳐다봤다.
"응?"
"별이 됐을 거에요. 어딘가에서 누군가 태어났을 것이고. 그녀는, 초라하지 않아요."
술에 취했다. 느낄 수 있다.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응, 괜찮아요."
-E.P.-
꽤 시간이 지났다.
과장이 되었다.
하늘은 맑았다. 흰 구름이 떠나녔다. 하늘과 구름을 보기에는 수조통 위가 딱이다. 바람이 귀를 스치고 지나갈 때 어딘가에서 한숨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죽겠네……."
애한이 섞인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봤다. 풋풋한 인상의 20대 남자였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이 새로 들어 온 인턴 같았다.
문득 떠올랐다.
"야, 죽겠네 죽겠네 하면 진짜 죽어버린다?"
"예!?"
내 외침에 나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 애가 기겁을 하고 대답한다.
'의사 선생님, 죽겠네- 죽겠네- 하면 진짜 죽어버려요?'
.
.
.
이제, 죽겠다고는 안 해요.
슬며시 미소가 났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