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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 과연 해피엔딩일까?
게시물ID : movie_415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약밀매상
추천 : 6/7
조회수 : 161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3/17 15:04:23
※ 이 글에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예를 들어 유주얼 서스펙트를 찍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속 케빈 스페이시의 진술은 모두 진실이며 우연히 게시판에 붙은 신문기사와 겹치는 내용이 있었을 뿐이다. 절름발이가 갑자기 다리를 절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범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20여년 동안 이어져 왔던 유주얼 서스펙트에 대한 관객들의 수많은 논의들이나 평론가들의 비평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리는가? 

만약 그렇다면 영화감상은 답이 미리 정해져 있는 수학문제 처럼 '감독의 생각 맞추기'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또한 그리스 시대 창작자를 알 수 없는 조각이나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들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평은 모두 의미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게 된다. 칸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시상하기 전에는 반드시 감독을 소환하여 청문회를 거쳐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의 각기 다른 해석에 최종 정답을 내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감독 밖에 없으니까. 해당 감독의 말 한마디에 작품의 가치는 요동을 치게 된다.

"감독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은 틀렸다" 라는 주장은 예술 감상의 방법론 중 하나인 '효용론적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효용론적 해석은 독자가 예술작품이 창작되고 향유되는데 있어서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는 관점이다. 구조론, 표현론, 반영론, 효용론 등 어느 하나가 해석의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이고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은 틀렸다'는 생각은 예술을 바라보는 4가지 균형잡인 시각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가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영화평을 읽으면서 설마 영화감독들이 거기까지 생각했으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 평론가를 욕보이는게 아니라 감독들을 욕보이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영화감독은 동시대 문화의 파수꾼입니다. 히치콕의 현기증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 영화는 영국영화잡지에서 전세계 영화감독들로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 중 하나로 추천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히 스릴러라면 왜 이렇게 평가받았을까요? 왜 이 영화에서 냉전이데올로기의 정신분열증을 찾아내면 안되는건가요? 디킨즈와 발자크의 소설에서 자본주의를 읽어내며 코폴라의 대부를 자본주의기업의 병적증후군에 대한 비판이라 읽어내면, 과장이라고 생각하나요? 관객은 보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낯선 읽기를 참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영화가 정 반대의 의미였거나, 다른 것이었다는 걸 알면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 거부감의 밑바닥에는 “영화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영화감독이 뭐 그렇게까지 생각할까?” 라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보세요. 
(정은임, 정성일의 영화이야기라는 라디오 방송을 녹취한 내용중 발췌. 원문 http://cafe344.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WZm9&fldid=KsHn&datanum=345&openArticle=true&docid=WZm9KsHn345200502041519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이런 효용론적 관점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지나친 인상주의, 상대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보라색이 과연 죽음을 상징하는가?' 같은 문제들 말이다. 아랫쪽은 황순원의 인터뷰 내용에 대한 엔하위키의 자료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복선의 기법이 매우 훌륭해서 오랫동안 복선의 예시로 자주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소녀의 죽음을 상징하는 도라지꽃의 보라색. 복잡한 복선이 아니라 단순히 작가 본인의 보라색에 대한 취향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소위 '황순원 씨의 인터뷰'라고 하는 게시글이 온라인상에 돌아다니고 있지만, 황순원 작가는 2000년 타계하였는데 이 카더라가 떠돌기 시작한 건 2011-2012년으로 비교적 최근이며, 실제로도 황순원 작가는 생전에 언론의 인터뷰를 모두 거절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s://mirror.enha.kr/wiki/%EC%86%8C%EB%82%98%EA%B8%B0 엔하위키의 자료라서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나름 구글링 해보았으나 황순원님의 인터뷰는 찾을 수 없었다)

독자가 작품에서 느낀 의미와 작품의 객관적인 의미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독자가 주관적으로 느낀 의미만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는 감정의 오류 (affective fallacy) 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효용론적 해석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창조적 해석'을 단순한 '과잉해석'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 할 필요는 없다. 수학공식을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7-3 =4 라는 공식에서 '-' 를 자의적으로 '+' 로 해석하여 정답이 10 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왜냐하면 문제를 제시하기 전에 '-'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사람들의 합의를 거친 '약속된' 기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대사, 소품, 연기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관해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가? 아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더러 뭔가 답을 구하기 위한 행위 자체도 아니다. 감독이 미리 특정한 결말을 예정하고 있었다거나 처음부터 열린결말을 예정하고 있었다거나해서 독자의 해석이 어느 한쪽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는 '열린 예술작품: 카오스모스의 시학' 이라는 자신의 저작에서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해치는 것으로 지양해야함을 강조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예술처럼 뚜렷한 형태와 선명한 색 즉, 명료함을 추구했던적도 있었지만 현대예술은 그와 달리 중의성, 다의미성, 모호성, 복잡성이라는 요소들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이상의 시, 달리의 그림, 트리에의 영화를 떠올려보라. 감독의 해석은 자기 작품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관객들의 상상력에 족쇄를 채워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작가는 글을 쓰다보면 캐릭터가 작가의 손을 떠나 혼자 걸어가기 시작하는 단계가 온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작가도 캐릭터를 인형처럼 좌지우지 할 수 없고 캐릭터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관객을 만나고 일정 단계가 지나버리면 개별 관객들에게 영화는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독립된 주체가 된다. 그 단계에 이르면 감독이 최초에 의도한 바가 있더라도 참고 의견이 될 수 있을뿐 독자적으로 형성된 의미를 근본적으로 좌지우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작자 - 작품 - 독자' 의 관계에서 작품의 최종 완성은 결국 독자의 단계에 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놀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인셉션의 결론이 해피엔딩임을 밝혔다고 한다. 놀란 감독의 인터뷰로 인해 인셉션의 의미는 해피엔딩으로만 제한 되어버리는 것일까?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이 수작 영화를 새장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간곡히 바란다. 


저의 주관적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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