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이미지는 좋은 편인데 안철수가 가진 태생적 한계랄까 그런것도 역시 존재한다고 봅니다.
고생하지 않고 살아온 잘 사는 집안의 아들내미 인상, 소극적이고 우아하고 지적인 이미지 말이죠.
내면에 있어서는 시대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럼으로 정치적 핍박을 당하는 쪽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그러나 정의와 진실을 진지하게 갈구하며 몸을 바쳐 투쟁하는 적극성은 없지요.
일반적으로 안철수가 자신의 입장 표명할 때는 최대한 점잔은 형식으로,
적당한 높낮이로 어떤 현실에 대한 상황을 인식 및 고려하고 있다 정도이지,
정의와 진실이 바른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반대편에 맞서 싸울 스타일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즉, 이거라도 좋고 아니어도 어쩔수 없다.
그런 모든 것이 과정이고 운명 아니겠냐 하는 탈정치적, 중립적 마인드이지요.
그 중립적 이미지가 바로 안철수의 코드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안철수의 의도에 의해 단기간에 형성된 모습이 아니라,
그가 살아오는 동안 경험을 통해 얻게 된 모습이라 봐야겠지요.
아무튼 이 중립의 코드,
그로부터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방향성을 모색해 가는 사람이 바로 안철수가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안철수가 지향하는 관점은 민주주의가 성숙한 서구 유럽에서 통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처럼 좀 더 완전한 민주주의로 가는 단계에 있는 국가에게 어울리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안철수가 한국 정치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로서 존재의의가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정치에 혐오를 느낀 젊은층에 중도주의 우파로서 온화한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는 있다는 점,
피흘리며 투철하게 임하기 보다는 경계를 허물고 학구적인 자세에서 광장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는 쪽에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정치 현실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안철수에게로 향한 것이지,
안철수의 본질 자체가 대중이 염원하는 속 깊은 바람과 완전하게 일치해서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안철수는 모범 답안은 아니지만, 차선의 선택은 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의 바람과 안철수의 중도주의가 협력하면 엉뚱하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지요.
정치현안에 대해서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대충 덮어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 말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이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안철수가 지향해 온 일관된 모습은 중도주의을 바탕으로 한 기계적 협력이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는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시간이 좀 늦더라도 진지하게 바른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매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정부분 적과의 동침을 통해 상처를 대충 봉합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가의 갈림길,
그 이정표가 되는 기준점이 바로 안철수라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어떤것이 꼭 옳다라는 성급한 판단은 유보합니다.
대중이 판단해야 할 문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