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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아나키스트가 한 명의 대선 후보를 지지하게 되기까지
게시물ID : sisa_3062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꼬망꼬망
추천 : 3
조회수 : 2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19 01:19:43

이 늦은 시각,

24 시가 넘어가고 나서 특정 후보를 거론하며 지지나 반대 의사를 밝히면 선거법 위반이 된다고 하지만,

넘치는 감정을 누를 수 없어 글을 남깁니다.


일단 제목에서도 보실 수 있듯이,


네, 전 아나키스트입니다.

우리 말로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자칭 보수라 칭하시며, 나름 이름 있는 대학의 지식인이신 선배께서

무정부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를 구분하시지 못하던 웃지 못할 경험을 한 관계로

대부분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설명을 드리자면


국가 권력이나 사회 권력 등의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무정부 사회를 주장하는 사람

이 바로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이런 제 입장을 밝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워 하더군요.

마치 혁명이라도 일으킬 사람처럼 경계부터 하던 사람도 있고,

국가를 부정한다고 하니 막연히 위험하게 보는 사람도 있고.

어찌 됐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케이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끔,

정말 가끔,

'그냥 막연히 정치가 싫어서, 정치인들 하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정치 혐오증에 걸린 애송이의 헛된 생각'

이라고 보시는 어른들이 있는데,

그리고 제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한두 분 정도 있을 수 있는데,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무리 20 대 초반의 사회초년생이라 할지라도 사고하는 성인이며,

시류에 어물쩍 편승하거나 남의 생각에 줏대 없이 흔들리지 않는 저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고,

그 철학의 기반 위에서 쌓아 올린 정체성입니다.

제게 직접적으로 저런 식의 생각을 표출하신 그 분께 말씀드리자면

평소 언행을 보았을 때,

세월의 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신보다 제가 더 신념 있고 생각 있어 보일 정도입니다.


여기서 제 철학을 말하는 건 사족인 것 같아 더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어찌 됐든,

전 아나키스트이고

한국의 국가 권력 내에 살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네, 저도 당연히 투표할 겁니다.


대한민국에,

이 땅에 진정으로 대통령이 뽑히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만이 나왔다면,

설령 조금 부족할지라도 대통령의 그릇이 있는 사람들만이 나왔다면,


전 당당히 무효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선거란

어느 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닌,

그 어떤 사람도 대표가 되어선,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게 되어선 안 된다는

제 입장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총선 때부터 그리하였지만,

어떤 정당, 어떤 후보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서

다른 정당, 다른 후보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보가 된다면

제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자유가,

그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아선 안 되는 자유가

무참히 꺾이고 짓밟히 것이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가 무효표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반대에 서 있던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선택이 매우 슬펐습니다.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위해 신념을 잠시라도 굽힐 수 밖에 없는 현실에 통탄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울적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후보께서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일화들을 들으며

그 후보께서 내건 공약들의 진정성과 감수성을 읽으며

그 후보께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의 품격과 배려를 보며

그 후보께서 하시는 말씀에 담긴 결의와 순수함을 느끼며

생각이 변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믿고 뽑을 수 있겠다.

잠시 내 입장을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혹은 그것을 넘어선 사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겠다.


이렇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전 그렇게

한 명의 대선 후보를 진정으로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전 앞으로도 아나키스트로 살 것입니다.

슬프지만 제가 원하는 무정부 상태는 지금으로선 실현 불가능입니다.

사람들의 인식 문제도 아니요, 기득권들의 행태 때문도 아니요,

과학 기술이 아직 그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음일 뿐입니다.

어쩌면 전 평생 제 이상이 실현 가능한 단계를 보지 못할 지도 모르고,

따라서 언제까지 선거라는 제도에 참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무효표를 찍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대선이 무효표를 내지 않는 마지막 선거가 되길 바라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 슬프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적어도 제가 지지하는 후보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비록 그것이 뜻하는 게 그만큼 현실이 암담하다는 것이지만,

그 후보께서 밝게 비춰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끝이 다가왔습니다.

전 아침 일찍 투표할 것입니다.

어두운 새벽의 칼바람을 헤치고

흑백의 투표 용지에

민주 열사들의 영광스런 피를 찍겠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환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것입니다.


참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중간 중간 미심쩍은 일도 많았고,

아직까지도 모든 게 허탈하고 어이없고 말도 안 돼 보입니다.

그러한 중간 과정들이 아무리 더러웠다 할지라도

전 믿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적어도 결과만큼은 정의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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