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마음은 천근만근인데
친구들 앞에선 쿨한척 하는 중이라
익명의 힘을 빌려 하소연이라도 해 봅니다
----------------
어제, 남자친구가 나에게 헤어짐을 고했다.
내가 참 잘해줬고
고마워하고 있지만
자기와 함께 걸어갈 수 없을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가 찾던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는 사과를 찾고 있었는데, 내가 사과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포도였다고 했다.
100일도 되지 않는 너와 짧은 연애기간 동안
너무너무 바쁜 너를 보기 위해서는 일주일, 아니 열흘, 2주정도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사귀기로 한 다음날부터 서로의 사정으로 인해 거진 한달을 못봤으니....
또한 겨우 다섯손가락에 꼽을 만큼 전화통화를 했고
다른 연인들에 비해 사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텀이 길고
나의 일방적인 애정표현으로 점철된 카카오톡을 주고받았다.
너는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니 나에게 그것을 배울 떄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바쁜 너를 이해하려 했고, 여러가지로 위해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투정도 참 많이 부린 것 같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너도 날 위해 안보던 핸드폰을 보다 자주 확인했고
가끔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만나기도 하고
만나면 벅차오를 정도로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아껴주었고, 내 투정을 받아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 나는 다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여러 번 서러움을 토로했다
너는 의심과 사랑이 같이 있을 수 있겠냐고
너를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결코 연락과 만남의 빈도수가 마음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그럼에도 자주 확인받고싶어 했다.
네가 나보다 일을 우선시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커플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다.
동갑이면서도 서로 존댓말을 썼으며
둘 다 같은 전공의 미대생이었기에, 데이트는 주로 좋은 전시와 연극을 보러 갔고
드문드문 하는 연락 덕에 서로의 일과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무관심, 오지않는 연락, 하늘에 별 따기보다 힘든 만남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내 가까운 지인들은
"너희 문화생활 데이트메이트하냐"
"행복하려고 연애하는건데 그렇게 힘들어할거면 헤어져라"
"걔는 아무 노력도 시간도 들이지 않고 널 옆에 두려고 하는구나
연인은 남는 시간에 만나고 남는 시간에 연락하는 존재가 아니야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그냥 연애가 하고싶은 거거나.. 둘 중 하나겠지"
라고 말하곤 했다.
나 또한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분명 있었지만
혼자 분열했다가, 합리화했다가, 또 분열했다가, 합리화했다가..
힘들다 헤어져야하나.. 하다가도 또 너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하며 너의 색을 조금씩 내 색 위에 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학교에서 중요직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나에게 했다.
나는 그 말을 나에게 처음으로 해줬단 사실이 고마웟고
너의 앞길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너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으나
지금보다 더 바빠진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
"바빠져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거라는" 너의 말에
"그러다 내가 포기할수도 있지" 라고 말해버렸다
거기에 난 댐이 터진 듯 그동안 참고 참았던 서러움을 쏟아부었다, 내용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넌 그때부터 마음정리를 하기 시작했던 걸까
우린 그런 류의 카톡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바로 다음날
너는 억지로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기로 했다.
이때 나는 막연하게나마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겨우 너의 생활패턴에 익숙해지던 시점에, 갑자기 그렇게 더욱 바빠진다면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르다면 이르고 늦다면 늦은 저녁시간
이따 출발할때 연락할게요 라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너는 연락이 두절되어버렸다
처음에 나는 화가 났으나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네가 결코 이런식으로 나올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다가 사고가 난 건 아닐까, 핸드폰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어디 다치진 않았겠지......
이른 아침에야 연락이 닿았고 넌 과로로 화장실에서 쓰러져 잠들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곧바로 허겁지겁 전화를 걸었고, 목소리를 듣고.. 끊고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너를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야기하기로 했던 것은 흐지부지되어버렸고
그 다음 만남에 너는 내게 헤어짐을 고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하나가 다 복선이었구나.
굳이 나를 피아노카페로 데려간 것
시간이 늦어 피아노를 칠 수 없어서 과하게 섭섭해 했던 것
나한테 예전에 피아노 쳐주기로 한 약속 때문에 그랬던 거겠지...
그리고 나한테 동영상 찍지 말라고 정색하고 말했던 것
서로 만들어 준 커플팔찌를 답답하다는 이유로 빼서 나에게 돌려준 것
내 손을 먼저 잡아주지 않았던 것
이상하게 나한테 차갑게 굴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명확했는데.
헤어지자는 말을 돌려 돌려 하는 너를 몇 번 붙잡았다.
안 헤어지면 안되느냐고.. 내가 너무 힘들게 한 것 같다고. 내가 고치겠다고...
너는 지금의 내 색깔도 충분히 예쁜데 굳이 자신의 색으로 칠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난 거기에 좋으니까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냥 노력하겠다고.. 내가 노력하겠다고만
너는
"파란색 위에 빨간색을 칠한다고 빨간색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없이 빨간색에 가까워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결국 보라색일 뿐이에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찾는 완벽한 빨간색 사과는 이 세상에 너밖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더는 붙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라는데
마음이 식었다는데..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같이 어디를 놀러가고 뭘 하고를 신나게 이야기하던게 정말로 엊그제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너의 마음을 그토록 빨리 식어버리게 한 걸까
내가 네가 찾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서 그렇게 확신해버린 걸까?
대체 처음에 네가 생각하고 좋아했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날 사랑하던 재미에 살던 사람이고 색깔도 아주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가 내 색을 포기할만큼, 좋아했는데...
내 파란색이 너의 빨간색으로 칠해지더라도 나는 그게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마지막으로 지하철을 탔을 때 담담하게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지켜볼 자신이 없어 등을 돌렸다
원래는 누구 한명이 먼저 타면 다른 한명이 갈 때까지 웃으면서 봐주었는데
웃으면서 보내 줄 자신이 없어서...
P씨
연애에 환상도 낭만도 없다고 했으면서
나를 좋아한 게 아니라 당신 머릿속에 있는 나를 좋아했던 건 아닐런지요
의심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결국 가장 강하게 의구심을 품었던 것도 P씨였군요
그래도 만난걸 후회하지 않아요
카톡 하나에 기분이 붕붕 뜨고, 손 꼭 잡은 동안 날아갈 듯이 설레고.. 했던 나날들
P씨는 꼭 원하던 빨간색 사과를 찾고
나는 같이 나무를 키워나갈 사람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앞으로 연락하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미련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마웠어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