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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CIA청문회 TV중계 했었다
게시물ID : sisa_4186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百年戰爭
추천 : 38
조회수 : 119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7/26 22:28:17
출처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726215110293

-극단적 인사 배제 후 폭넓은 스펙트럼의 청문위 구성
-77년 CIA의 청와대 도청, 지금과 달리 당시 청와대는 강력 항의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3년 7월 26일 (금)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 정관용 > 국정원에 대한 기관보고 오늘 무산됐습니다. 이거 공개하면 안 된다라는 새누리당의 입장, 공개해야 된다는 민주당의 입장이 맞섰기 때문이죠. 그래서 과거 70년대 미국의 사례를 좀 배우겠습니다. 70년대 CIA가 여러 가지 불법활동들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서 의회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낱낱이 캐묻고 CIA의 개혁까지를 이루어낸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김정인 교수 연결해 보죠. 김 교수님 안녕하세요.

◆ 김정인 >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 CIA, 중앙정보국이죠?

◆ 김정인 > 그렇죠.

◇ 정관용 > 우리 한국은 옛날에 KCIA 해서 한국중앙정보국 그랬었고요.

◆ 김정인 > 맞죠. (웃음)

◇ 정관용 > 이게 언제 만들어졌던 거죠?

◆ 김정인 > 1947년도에 미국의 국가안전보장법에 따라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립이 된 것입니다.

◇ 정관용 > 여기는 주로 해외정보 파트입니까? 여기에서 국내정보도 합니까?

◆ 김정인 > 미국에 여러 가지 정보기관이 있지 않습니까? 각 정보기관을 총괄, 조정하는 역할도 하게 되어 있고요. 주로는 외국정부나 기업이나 주요 인물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 분석한 뒤에 미국 정부의 각 부처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정관용 > 현재 우리 국정원하고 사실 그러니까 거의 비슷한 거예요?

◆ 김정인 >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정관용 > 그런데 70년대에 미국 의회가 CIA를 여러 차례 청문회에 세운 적이 있다. 그래서 공부하려고 제가 연결을 했거든요. 시작이 언제입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 김정인 > 물론 60년대부터 계속 CIA의 어떤 불법행동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됐었는데요. 큰 계기가 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 CIA나 FBI 같은 정보기관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적인 기구처럼 전락한 것처럼. 그러면서 불법활동을 했던 게 계속 드러나게 됐습니다.

◇ 정관용 > 닉슨이 대통령 시절에 재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을 하는데 상대 진영 도청하고 그게 워터게이트죠?

◆ 김정인 > 네, 그렇죠. 그게 워터게이트 사건입니다.

◇ 정관용 > 그때 CIA가 직접 도청에 관여했나요?

◆ 김정인 > 그런 직접 도정에 관여했다, 이렇게 얘기하기보다는요. 그 뒤에 은폐하는 공작을 할 때 거기에 관여한 것으로. 그래서 대통령의 지휘를 받아서 FBI와 함께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여지지만 일단 그 사건이 나오면서. 미국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추락을 하게 되니까요. 정보기관인 CIA가 어떤 일을 하게 됐느냐, 이런 것들을 낱낱이 언론이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됐던 겁니다.

◇ 정관용 > 어떤 것들을 한 게 드러났습니까? 언론 폭로를 통해서.

◆ 김정인 > 제일 먼저 드러나게 된 것 중의 하나가 해외 지도자들한테 뇌물을 줬다고 해서 CIA 뇌물사건이라고 해서요. 16개국의 17명 지도자들한테 뇌물을 준 사건이 폭로가 됐고요. 국내적으로는 반정부 인사에 대한 사찰임무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니까 그런 부분들이 드러났고 또 마약실험을 했던 것까지 다 드러나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죠.

◇ 정관용 > 해외에서 쿠데타 이런 것 지원하고 이런 것도 드러나고 막 그랬었죠?

◆ 김정인 > 네. 제일 대표적인 게 칠레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걸로 해서. 그건 아예 특별히 청문회가 열렸죠, 독자적으로.

◇ 정관용 > 또 공산국가 지도자 암살시도, 이런 것도 있었죠?

◆ 김정인 > 가장 유명한 사람이 카스트로인데요. 공산국가뿐만 아니라 반미적이면 중동이든 아프리카든 남미 지도자들의 표적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 정관용 > 우리나라에 관련된 폭로도 그때 있었는데요.

◆ 김정인 >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요. 아까 말씀드린 정치나 뇌물 준 사건에 타이완의 장제스와 함께 이승만도 받았다, 이런 얘기가 나와서 파란이 일어났는데. 프란체스카 여사가 그때 살아계셨거든요. 즉각 부인하는 그런 해프닝이 있었고요.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청와대 도청 사실이 폭로가 돼서.

◇ 정관용 > 아이고.

◆ 김정인 > 우리 정부와 의회는 요즘과 달리 주권침해라고 강하게 항의를 했고요. 지금은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상이군경회를 비롯해서 고등학교, 대학교, 각종 사회단체가 반미 궐기대회를 합니다, 주권침해라고. 그런 사건도 있었습니다.

◇ 정관용 > 이게 다 70년대 후반부 쪽이죠?

◆ 김정인 > 그렇죠.

◇ 정관용 > 지금 말씀해 주신 게 주로 언론의 폭로로 시작돼서. 그다음에 거기에서 의회 청문회로 이어지는 과정이 어떻게 됐습니까?

◆ 김정인 > 언론의 폭로가 걷잡을 수 없게 돼서 본인들끼리도 너무 과도하다 할 정도였는데요. 국민들이 워낙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상태에서, 정보기관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해서 불법행동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미국 의회로서도 그것을 그냥 덮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워터게이트 식의 어떤 청문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정관용 > 그래서 한 번의 청문회가 아니었죠?

◆ 김정인 > 상원 따로, 하원 따로 이렇게 또 사건별로 해서요. 75년에서 78년까지 거의 매일 열렸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낱낱이 그게 공개가 됩니다, 청문회를 통해서.

◇ 정관용 > 75년에서 78년까지 거의 매일이요?

◆ 김정인 > 거의 매일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게 됩니다.

◇ 정관용 > 그러니까 한두 번이 아니군요. 이건 몇백 번이군요, 그러니까.

◆ 김정인 > (웃음) 그러니까 결국은 외교 갈등까지 일어나게 돼요. 왜냐하면 뇌물 받았던 사람이 버젓이 지도자로 있는 경우에는 외교관을 소환한다든지. 그래서 저희가 알고 있었던 박동선 게이트 같은 경우에도. 하도 미국 의회가 몰아붙이니까 CIA에서 미국 의회 의원들이 뇌물을 받았다, 로비를 당했다. 그런데 그게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더 많다더라, 이런 걸 흘리는. 그래서 박동선 사건도 우리 역사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미국하고 박정희 정권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그게 불거진 걸로 생각되지만. 미국 안에서 보면 계속 밀리는 CIA가 반격을 한 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관용 > 그렇군요. 그때 미국에서도 CIA를 상대로 한 청문회 계속 안 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었을 거고. 그러나 어쨌든 떠밀려, 떠밀려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지만 비공개로 하자, 이런 목소리가 있었죠?

◆ 김정인 > 특히 행정부 쪽에서 그런 논란을 계속 벌였는데요. 그 못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워터게이트 사건이 청문회를 하게 되면서 워터게이트식, 워터게이트형 청문회 방식이라는 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미국에서.

◇ 정관용 > 이게 어떤 방식입니까?

◆ 김정인 > 그게 위원회를 할 때 지역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폭넓게 대변될 수 있는 그런 위원회를 구성해서요. 사실은 극단적인 정치성향의 인물들을 제외하는 그런 어떤 움직임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된다라고 하는 게, 원래 정보자유법이라는 게 미국에 있었는데요. 74년도에 개정이 되면서 더 확대가 됐어요. 그러면서 청문회를 공개로 진행했는데 그때 워터게이트 사건 때의 초점이 TV중계를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TV로 중계를 해서 전 국민이 다 같이 보는 게 중요하다, 이런 원칙이 세워졌는데. CIA 청문회를 할 때 미 의회에서 아예 워터게이트형 청문회를 채택하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청문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정관용 > 모든 청문회가 다 공개되고 TV중계 했나요?

◆ 김정인 > 그걸 자세히 제가 세밀하게는 말씀드릴 수 없는데. 파악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일단은 공개원칙이라는 게 있어서.

◇ 정관용 > 거의 대부분?

◆ 김정인 > 거의 대부분 공개한 것으로 되어 있고요. 마지막에 보고서 채택하고 보고서를 공개하는 과정에서는 조금 조정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문회 과정 자체는 거의 TV중계를 하려고 했던 거고. 행정부가 계속 법원까지 동원해서, 법원에 이거 금지시켜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는데요. 법원이 거부를 합니다. 국가기관은 법 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해야 된다는 이유로 기각을 시켜주죠.

◇ 정관용 > 그렇게 청문회를 해서 진상을 밝히고. 그래서 그 이후에 후속작업은 어떻게 됐습니까? 위법사실로 나타나면 형사처벌 쪽도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CIA 자체의 어떤 구조적 개혁도 있을 것이고. 그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됐나요?

◆ 김정인 > 특히 증인 중에서 위증한 사람들은 다 범죄처벌 받았고. 그다음에 처벌받은 사람들도 있고 중요한 건 개혁이 이어졌는데요. 일단은 대외 정보기관에 대한 의회의 감독을 강화하고. 특히 제3국에 대한 정치개입을 금지하는 그런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고요. 당시 포드 정부에 이어서 카터정부까지 쭉 이어졌었거든요, CIA에 대한 청문회가. 그러면서 계속 포드정부도 마찬가지고 카터정부도 정보기관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법률을 시행했습니다. 실제로 개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정관용 > 그리고 그 CIA 개혁을 그러면 주도할 조직이나 이런 건 만든 바가 없습니까?

◆ 김정인 > 그건 없는데 행정부 쪽에서도 사실 의회에 지금 국정원 개혁처럼 이렇게 정보기관 개혁에 있어서는 정부의 의지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국에서는 여론이 굉장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포드정부에서 민간위원회도 만듭니다, 특별위원회를, 그래서 8명의 민간인과 록펠러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부 스스로도 CIA의 어떤 불법수사 사례들을 조사해서 발표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해 나가죠.

◇ 정관용 > 포드정부는 공화당 정권이고 카터정부는 민주당 정권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공화당 의원, 민주당 의원이라고 해서 서로 이거 공개하자 말자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그런 적은 없었나요?

◆ 김정인 > 그런 건 제가 사례를 찾지 못했습니다.

◇ 정관용 > 의원이라면 모두 공개원칙에 찬성했다?

◆ 김정인 > 그렇게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는데요. 제가 알기는 어려운데 어떤 게 있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일단 위원회를 뽑을 때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을 하거나 한편에 서서 입장을 가지고 몰아붙이는 이런 경우에 의원들을 배제시키고.

◇ 정관용 > 중도파 의원으로 했다는 거죠?

◆ 김정인 > 지역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안배를 하는 그런 방식으로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요. (웃음) 그게 지금 저희 국정원하고 다른 방식인 것 같습니다.

◇ 정관용 > 온건파, 지역 안배 이런 등등으로 일단 청문회 위원을 구성한다.

◆ 김정인 > 그래서 논란이 없고 증인 채택한 이런 거 가지고 특별히 논란이 돼서 문제가 됐다는 건 신문기사를 제가 검색해 봤는데 없더라고요.

◇ 정관용 > 다시 말하자면 너무 센 주장이나 또 너무 부담스러운 증인. 서로들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빼더라도 가능한 선에서는 열어나가자, 대신에 온 국민에게 알리자.

◆ 김정인 > 그렇죠.

◇ 정관용 > 그리고 진실로 다가가자, 이런 식이었군요.

◆ 김정인 > 그렇죠. 그게 그런데 사건이 계속 터지니까 한 번에 끝나지 않고 한 3, 4년을 계속 그걸 TV중계를 통해서 보게 되니까. 국민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CIA의 상당히 많은 조직이나 운영 이런 것들이 사실 노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또 그것이 개혁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죠. 왜냐하면 노출되어 있으니까. 국민을 보호해야 되는 차원에서 다시. 그래서 공개가 곧 어떤 개혁의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 정관용 > 말씀 고맙습니다.

◆ 김정인 > 네.

◇ 정관용 >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김정인 교수의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게 1975년에서 78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2013년에 살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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