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점진적으로 변모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정이던 매국이던 범죄이던 말이지요.
이전에 노예들이 그랬죠. 나만 쳐맞는 것도 아니고 다갖이 쳐맞으니깐
무뎌지는 겁니다.
본래 사람의 통각이라는 것도 매일 똑같은데 쳐맞으면 아픈 줄도 모르죠.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현실의 부당함과 상식적인 세상에 대한 울부짖음이 개소리로 외면당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민주주의체제와 자유주의체제가 성립된 것입니다.
전제정치를 뒤엎은 프랑스대혁명
식민시대 종식을 시작한 미국독립전쟁
노예해방을 시작한 남북전쟁
평등을 위해 분투하 20세기초의 유럽 인권단체
최소한의 인권을 위해서 시작된 유럽 복지제도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싸운 독립군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4.19혁명, 5.18민주항쟁
독재타파를 외치던 86년 민주항쟁
국민의 선택권과 정치권의 독주에 항거했던 탄핵반대 촛불집회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고자 했던 한미 FTA 촛불집회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수많은 실패도 있었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당시에도 대다수가 현실에 안주하여 자신의 배만 채우길 바라면서
구경만 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때에도 배고파 죽을 것 같았어도 항쟁하기 보다는 집에 쳐박혀서 본래 그러한 세상이라면서
감자죽이나 먹던 사람들이 더 많았죠.
세상은 대다수의 무관심 속에서 소수의 외침으로 변모한다고 합니다.
북한이 배고파 굶어죽어도 김정은 정권에 항쟁하지 아니한 이유는 불씨가 없었기 때문이죠.
소수의 외침을 아오지 탄광으로 묻어 버렸으니깐요.
한국도 그랬습니다. 소수의 외침을 빨갱이로 안기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풀려난 뒤에서 세상에서 매장되었죠.
하지만 끝임없는 두드림 속에서 세상에 변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이 북한과 한국의 차이입니다.
오유시사의 외침이 인터넷세상에서의 고요한 외침일 수 있으나
한국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스스로의 속내를 감추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타협을 한다지만 점점 암담해지는 삶 속에서 막다른 길 혹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분출구가 지금의 촛불집회이겠죠.
세상을 살다보면 다른 정치관과 이상향을 갖는 사람들과의 분란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기 꺼려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익명성에 동조하여 모인 곳이 인터넷세상이고 지금의 오유시사처럼 자신의 분노와 상식을 이야기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기도 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현실에서의 세상과 인터넷에서의 세상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넷세상과 현실에서 말하는 우리의 행동에서 본심이 어디에 더 들어나는가?를 생각한다면 현실에서의 스스로의 모습에서
진실성을 얼마나 내포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자신만의 모습이라고만 생각하지 아니한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가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세상의 부조리는 어느 나라나 역사에서나 나오지만 그러한 부조리를 바꾸는 것은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가 당당한 사람이겠죠.
그러한 당당함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눈치보면서 구우일모의 행동으로 넷에서 활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유시사는 스스로 바꾸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닌 현실에서 스스로를 감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내면을 달래는 곳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익명성에 기대어 오유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