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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대의에 대한 착각과 좌파들의 문제
게시물ID : sisa_4225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환상횡단하다
추천 : 6/12
조회수 : 671회
댓글수 : 79개
등록시간 : 2013/08/05 22:12:02
포스트모던의 철학들은 정의와 대의론 따위의 주장을 쿨하게 넘겨버린다. 그들은 정의와 대의의 바탕이 되는 보편성(어떤 것이 명백하게 옳아야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즉, 보편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정의와 대의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철학 사조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의나 대의같은 문제의식에 냉소적인 것이다. 그들에겐 그와같은 양단의 문제들이 폭력으로 보인다. 실제로 인류역사가 그래왔던 것은 사실이다.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 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저서 '슬픈 열대'에서 서구의 오만한 문명을 비판하며 이와같이 한탄을 했다.
 
"기계문명이라는 덫에 걸려든 불쌍한 노획물인 아마존 살림 속의 야만인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라지게 한 운명을 이해하는 것까지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런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대들의 모습을 대신하는 총천연색 사진을 흔들어대는 요술. 당신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요술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슬픈 열대, 145p)"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그가 일생동안 다닌 문명들을 기록한 저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서구 문명의 오만함을 통렬히 비판하고, 서구가 그들에게 한 식민지 지배들의 당위성을 묻는다. 그에겐 서구만이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는 오만, 그러므로 자신들의 문명이 인간의 보편성이고, 나머지의 문명은 인간외의 취급을하는 서구 문명이, 적어도 서구에 의해 야만인으로 불리는 원시 부족들 보다 훨씬 야만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뜬금없이 레비스트로스를 거론했냐?라고 한다면, 인류 역사가 가진 모든 야만적 폭력이 보편성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보편성.... 확고 부동한 완전한 대의 정의.. 물론 이와같은 보편성의 문제 나아가 이분법에 대한 문제는 소비에트가 무너진 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 종언이란 테제가 각광을 받으며 끝난것처럼 보였을테다. 이젠 이념 보다는 탈 이념, 정치 보다는 탈 정치(냉소), 진리 보다는 상대주의 따위의 것들이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소비에트가 무너진 것은 서구 지성사는 물론 직접적 영향권에 있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에 우리는 근대의 기획들(사회를 변혁 시켜야 한다는 윤리성)이 애초부터 쉽게 무너질 수수깡 놀이였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근대 기획 즉 보편성을 위한 투쟁이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었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한탄해서 말하던 (자기 외의 존재를 배제해야만 작동되는)보편성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던 사조가 바로 포스트모던 철학들이다.
 
현재 우리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위와같은 시대의 흐름에서 읽어보자. 양단의 비판 세력들이 얽혀들어 혼란스런 분위기지만, 우리는 이 상황에서 시대를 역행하는 두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은 정의와 대의에 대한 강박이다. 또 하나는 낡은 파쇼들의 문법들을 횡횡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흐름은 각자 기성 정치의 대립으로인해서 적대를 이루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세력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한 쪽을 상대를 통해서 보게 된다. 파쇼의 문법은 배제적 보편성에 기인하고, 그것은 근대의 낡은 기획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흐름을 따르는 녀석들은(일베) 정의와 대의를 말하는 배제적 보편성에 대한 논의가 없고(예를들면 베타적 민족주의같은 것들), 그러므로 보편적인 세력이 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물론 그들이 민족주의라는 보편성이 없는 대신에 조악한 국가론이나 여하간 기타 잡 보편성이 없다곤 할 수 없는 일.. 그렇지만 소속감이나 연대감 따위의 것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반대로 정의와 대의를 부르짖는 자들은 정치적 옳음같은 철학자들이 비아냥대던 아름다운 영혼의 포지션이란 자위는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때문에 종종 덜떨어진 반 민주적 행위를하게 된다(여기에 비하면 낡은 파쇼 문법을 따르는 녀석들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리고 두 세력 모두는 자기들이 가진 한계 때문에 자신들의 정의가 배신을 당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파쇼는 파쇼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배반하게 된다.
 
요컨데 이 두 세력은 낡은 근대 기획의 우스꽝스런 오마주 혹은 표피적인 멜랑꼴리한 현상일텐데, 본질적인 문제는 이와같은 것들이 시대를 어떻게 돌려놓고 있냐에 대한 문제이다. 포스트모던이 시대를 지배하면서 취존(취향 존중) 따위의 말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고 상대적이라는 윤리론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시대에 살고있는데, 이런 시대에 낡은 기획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어떤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가끔 정의와 대의를 입에무는 분들이 계시다. 그들은 상대주의의 시대에 절대주의란 낡은 복고적 주장을 뇌까리며 사람들을 타박한다. 그들이 유연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자신들의 세력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들을 감싸기 위해서 차악론같은 절대급이 아니라 상대급의 떡밥을 던지기도하는데,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의 실패가 최악을 불러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여하간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일말의 의심들을 배제한 보편성을 중심으로 당위론과 대의론을 떠들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빗금을 치는 대상이 바로 좌파들이다.
 
파쇼 버러지들의 주장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좌파들의 비판은 어떤가? 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좌파들은 왜 그렇게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나요? 왜 그렇게 절대 악 정의 당위론 따위에 메몰되어 있나요?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버러지들을 비난하는 자신들을 되 돌아보면 될 일이다. 과연 본인들은 어떤지?
 
여하간 내가 이 글을 쓰고자 했던 이유는 좌파들은 어떻게 다른가 또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상대주의의 시대가 오면서 좌파들의 계급론도 마모된 측면이 있다. 이제 혁명은 근대적 기획으로 누군가 대규모의 집회를 조직한다면 그 자체로 폭력인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좌파에게 남은 것은 뭐겠는가? 좌파들은 기실 사구체논쟁(사회구성체 논쟁)과 90년대 이후 많은 부분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받고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신좌파가 탄생하고 계급 중심 보다는 네그리식의 다중(Multitude)이란 개념이 유행하면서, 조직된 노동자 보다는 시민층(에티엔느 발리바)들이 더 전위적이고 급진적이라는 비판들이 나오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영향은 좌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보편성 보다는 상대성(특수성)의 존재론이 우위에 서면서, 좌파들은 정의와 대의를 부르짖는 자들을 냉소하게 되고, 그렇다고 낡은 파쇼론을 들먹거리는 버러지들과 한 패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진중권처럼 긍정적인 인간들은 그 속에서 제 할 일을 찾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좌파들은 진중권처럼 뻔뻔하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나는 위에 거론한 두 부류. 정의와 대의를 부르짖는 부루와 낡은 파쇼론을 떠드는 버러지들 사이에 제 3의 길이 있다고 믿는다. 한 쪽은 자기들의 정의론을 너무 과신하고 있으며, 한 쪽은 우스꽝스런 코스프레를하고 있다. 이 둘에 대한 냉소를 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나, 이 두 세력을 타산지석 삼는 일은 곱절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 주관적 해석이겠지만.. 이 두 세력은 시대의 반동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쪽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되도않는 반동으로.. 시대의 근본적인 변화를 차단하고 있고(그 힘을 기성 정치 대립의 싸움으로 소급, 대의니 정의니 이런 것들도 모두...), 한 쪽은 정의와 대의를 부르짖는 자들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과 반발심을 자양분으로 삼아, 낡은 옛 파쇼론으로 급속도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바로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보면 공생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낡은 파쇼론이 탈 정치의 징후일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해봐야 한다. 정의니 대의는 떠드는 그 인간들에 대한 일반 대중의 피로감이 어느정도인지는 오유를 벗어나면 명확한 것이다. 몇몇 특정 커뮤니티를 배제하면 거의 대다수의 커뮤니티에서는 정치란 이야기가 하나의 금기가 되었다. 심지어 오유에서도 일부 정치에 관련한 반발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피로감을 이용한 녀석들이 누구겠는가?
 
애초에 이 글에서 질문하지 않았던 것. 과연 계몽주의에서 말하던 보편성이란 게 포스트모던의 철학들이 까던, 배제를 통해 구축 된 보편성이었나? 과연 진정 정의와 대의는 없는 것일까? 보편성이 없다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정의와 대의가 없다면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이 모순적 상황에서 제 3의 길은 무엇인가. 칸트나 헤겔이 과연 포스트모던이 비판하던 그런 철학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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