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처음 대학교에 들어가 설레는 맘으로 다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3개월 내내 애태우다 사귀게 된 남자친구.
사귄지 6개월쯤 됐을 땐가, 같이 손잡고 밤산책하다 내가 가로등 불빛 가리키면서 아무 생각없이 "저 빛처럼 너도 내 빛이야." 하고 오글터지는 멘트를 했는데 갑자기 멈춰서서 날 안더니 "니는..... 니는 내 우준데."(경상도남자) 하고 울먹거리던게 생각이 난다. 너무 순수했던 너. 날 너무너무 사랑해줬던 너.
같이 첫눈 내리던 날 학교근처 분식집에서 김치라면먹던 기억, 내 생일날 아침, 내가 자취하는 원룸 앞 빈 콘크리트벽에 한가득 하얀 벽화를 그려 선물해줬던 너. 함께 여행갔던 경주 석굴암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선 나란히 앉아 외국인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석굴암 입장료와 차비를 벌어서 둘이서 좋아라고 웃으며 사진찍던 기억. 버스로 왕복 6시간 거리이던 너의 동네까지 찾아가 짧은 데이트 후에 다시 버스에 오르면 울고있는 모습 들킬까봐 창밖에서 배웅도 안해주던 너. 생일선물로 네 이름으로 기부해줬던 일을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자랑을 해서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 나의 생일선물을 알게했던 기억. 아픈 내 옆에서 밤새 지키며 서투른 아침을 차려주던 너.
길가의 지렁이 하나도 불쌍하다며 손으로 집어 흙 위에 놓아주던 너. 네 덕분에 개구리는 맨손으로 집으면 화상을 입는다는 걸 알아서 요즘은 나도 나뭇잎으로 살짝 감싸서 제 집에 놓아주곤 해ㅋㅋ 생일마다 접어주던 종이장미는 아직도 그대로인데 점점 색만 바래가네. 너와 내 관계처럼.
태어나서 한번도 맞고 커본 적 없다는 너와 아직도 술마신 엄마모습이 무서워 슈퍼가는 척하고 밤거리를 홀로 헤매는 나. 너무나 온화하고 평화로운 표정의 너희 부모님과 한달에도 몇번씩 죽어버리겠다는 메세지를 남기고 결국엔 경찰차를 타고 집에오는 우리엄마.
분에 넘치는 빛나는 너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우리엄마가 가족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너에게 어거지를 써가며 못된소리를 하고, 헛소리를 해가며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 모습이 문득문득 느껴질 때면 나조차도 섬찟해 웅크린 채 울기만 했어.
결국 내 모습에 지쳐 떠나버린건 나였지, 네가 아니었지. 울고있는 내 얼굴을 어루만져주면서 괜찮다고, 괜찮다고 끝까지 위로하고 안아주면서 돌아서던 네 모습이 오늘따라 선명하다. 너도 눈이 붓도록 울고있었으면서.
친구들에게 내 소식을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좀 더 따뜻한 어른이 되면, 내 마음이 좀 더 깊고 넓어지게 되면 그 땐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네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떠나온 건 나면서 매일 그리워하는 내가 나도 웃겨. 차라리 나보다 더 따뜻하고 예쁜 사람을 네가 만나 내 마음 접게해주면 좋겠다.
헤어지던 그 날처럼 다시 쌀쌀한 겨울이 온다. 이번 겨울을 너 없이, 텅빈 가슴으로도 강하게 버텨낼 수 있다면 조금은 굳건해지겠지.
안녕, 다시없이 날 사랑해주던 너. 난 아직도 힘들게 살아. 그렇지만 너라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도 사랑해줬다는 기억하나만으로 더는 널 만나기전처럼 불행하지는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