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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을 좋아한 경상도 아저씨
게시물ID : lovestory_495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달님사랑해요
추천 : 17
조회수 : 5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22 00:19:48

새벽 3

그제서야 세상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아 멍하게 누워있었다.

띠리리띠리리

새벽 3시가 지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글자가 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를 통해서나 안부 전하던 아버지가,

명절 때 언제 내려올 거냐는 전화만 하던 아버지가,

깊은 새벽에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아 그래 철수야. 우리 둘째 아들…..

목소리에서부터 술 냄새가 가득 풍겼다.

아버지는 종종 나를 굳이 둘째 아들이라고 부를 때가 있다.

취기가 올라오시면 같이 툭툭 튀어 나오는 말이다..

장남도 아니고 막내도 아니라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한 것에 대한 연민이 또 피어났나 보다.

새벽에 걸어온 전화 너머로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불렸다.

 

 

 

아버지는 경상북도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경상북도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신기할 일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문재인을 좋아했다.

지난번 대구에 내려갔을 때부터 문재인 칭찬이 마르질 않았다.

잘 생긴 사람이다.

성품이 좋은 사람이다.

걸어 온 길이 바른 사람이다.

한 번 믿어보고 싶은 사람이다.

마치 친구나 가족을 자랑하듯이 그렇게 해맑게 이야기하곤 했다.

가끔씩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항상 씩씩거리며 들어와선

지들이 뭘 알아!! 언제 색안경 벗고 꼼꼼히 살펴보기나 했어!!”

그리고선 혼자 못다 잡순 술을 마시곤 했다.

대선이 있던 오늘 아침에도

투표 때문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기분 좋게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일 마치고 늦게까지 술을 잡수신 모양이다. 아마도 혼자서

그러다가 또 둘째 아들이 생각난 모양이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저녁은 먹었나?”

새벽 3시가 지났는데 저녁 타령이라니. 말 꺼내기가 많이 힘들었나 보다..

…”

날씨 마이 춥제? 뜨뜻한 파카는 하나 있나?”

빙빙 둘러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일은 어떻노? 일 힘들지는 않나?..........”

대답이 채 하기도 전에 전화기 넘어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버지는 조금씩 울고 있었다.

철수야 미안하데이. 아버지라고 있는 게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니한테 줄 수 있는 게 뭐 하나 없네……

그래서 이번에 내가 조금이라고 힘을 보태가 좀 살만한 세상 만들어볼라 캤는데

내가 힘이 너무 없더라. 그래서 너무 미안하데이…”

희미하게 들리던 흐느낌은 서러운 아이의 울음처럼 커져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아버지가 미안하다며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처럼 강한 사람이었다.

울기는커녕 자식 앞에선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렇게 돌 같았던 아버지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물러졌다.

건설현장에서 오래도록 일했었는데 항상 에너지가 넘쳤고

틈틈이 공부까지 하는 여유도 있던 양반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기술자였고

모르는 게 없는 유식한 선생님이었다.

그때 난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단하던 아버지는 이제 스폰지처럼 물러져서

품고 있던 눈물을 하염없이 내벳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술 많이 드셨나 봐요. 피곤할 텐데 얼른 주무세요.”

아직도 킁킁거리는 아버지의 잔울음을 뒤로한 채 먼저 전화를 끊었다.

둘째 아들을 찾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그런데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니그건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버지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굳이 미안한 걸 찾았었나 보다.

그렇게 찾은 미안함은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걸 있는 힘껏 참았다.

내가 울면 안되니까

내가 거기서 울어버리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아버지가 정말 미안해지는 게 될 것 같아서

취기 어린 주정으로 넘겨버렸다.

아마도 가장 먼저 투표했을 아버지.

하루 종일 설렜을 아버지.

자신이 선택이 자랑스러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자랑스럽던 어깨는 산산조각 부서져서 돌아왔을 것이다.

아버지의 하루가 스쳐가고 눈이 따가워졌다.

나오려는 눈물을 삼킬수록 목이 잠기고

가슴이 먹먹한 게 건설현장에 날리는 시멘트 가루를 집어 삼킨 것만 갔었다.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럼 숨구멍이 조금이나마 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부치고 깊숙이 빨아당겼다.

담뱃불이 새빨갛게 타올라 새까만 어둠에 작은 흠집을 냈다.

그러나 담배는 너무 빨리 타 들어갔고 담뱃불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어둠이 어떤 불빛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타오르기 무섭게 집어 삼키는 듯 했다.

모든 불빛이 꺼져버린 깜깜한 새벽.

아침은 시간이 지난다고 돌아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날씨는 더 무겁고 어둠은 더 진했다.

긴 새벽이 될 것 같았고 희미하게 들여오던 아버지의 떨림이 잊혀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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