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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1)-에트루리아 사람들
게시물ID : history_42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10
조회수 : 220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5/01 07:38:43
1. 로물루스와 레무스 bc753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설했다는 로마인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 참고로 비슷한 연대에 세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bc770 주나라가 서융에게 털리면서 동천하였고 bc776 최초의 올림픽이 시행되었다. 오리엔트에서는 아시리아가 세계를 정복할 기세로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있었고 인도에서는 아리아인이 남서부에까지 진출을 하였다. 아직 이탈리아 반도는 세계의 변방, 야만의 시대에 속하던 시대이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수상할 정도로 정확한 bc753을 믿을지 말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사실 로물루스 신화 역시 여러 개의 버전이 있다. 그 중 플루타크 영웅전에 실린 것이 현재 널리 알려진 로마건국신화이다. 중요한 것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신화로 빚어낸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 신화는 초기 로마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에트루리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에트루리아인들이 늑대를 특별히 숭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로마문명에 깊이 새겨진 에트루리아의 흔적은 선명하다. 대표적으로, 로마건축하면 금새 연상되는 아치양식은 에트루리아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의 본거지 타르퀴니아. 아치로 된 입구가 보인다. 둥근천장 역시 에트루리아 건축양식의 특징이었는데 로마인에게 계승되었다. 2. 에트루리아는? 비문과 유물들을 통해 에트루리아에 대해 밝혀내려는 노력을 수도 없이 시도했지만, 여전히 에트루리아인들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일설에는 소아시아인들이 이주한 것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이탈리아 토착민들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이탈리아 중부에서 세력을 키우던 그들은 남쪽으로 팽창하여 이탈리아 남부의 마그나 그라키아와 조우하고 무역도 한다. 에트루리아인들은 100여년에 걸쳐 로마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야금술은 그 주변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는데, 우수한 철제무기가 이탈리아 중부의 패권을 장악하는 열쇠였을 것이다. 마그나 그라키아와의 교역품 역시 철과 금속이었다.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일은, 여성의 지위가 오리엔트나 그리스보다는 높았다는 점이다. 여성들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향연이나 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는 사회적 법률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누렸다. 관뚜껑에 무려 아내와 남편이 함게 새겨져 있다. 종종 아내의 무덤이 남편보다 더 크고 화려한 경우도 있다. 3. 로마인들의 반란 bc6세기 후반,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에게 대항해 폭동을 일으켜 에트루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그때까지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의 지배를 받았는데,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bc509년에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왕을 추방했다. 이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전쟁을 통해 에트루리아 측이 약해진 상황을 로마인들이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다. bc509년은 로마 공화정이 세워진 해로서 기념된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공화정이 폐지될 때까지, 로마인들은 왕정에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아마도 왕정 아래 신음하였던 에트루리아 시기에 대한 반성일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유산 중 많은 것을 흡수했다. 꾸준히 그리스와 교역을 하였고, 시민들을 군사적으로 조직하는 것 역시 에트루리아의 관습이었다. 검투경기, 점복술 역시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마로부터 축출된 후에도 에트루리아는 명맥을 유지하다가 bc350년을 전후하여 강성해진 로마에게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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