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잊혀진 전투 '장사상륙작전'
게시물ID : military_120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설익은곧휴
추천 : 24
조회수 : 16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22 22:55:39

 

 

【대구=뉴시스】제갈수만 기자 = "6.25 전쟁 당시 적들과 싸워 승리했지만 군번도 없이 전사한 전우들에게 미안하다"

경북 영덕군 장사리에서 당시 펼쳐진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채종만(81)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비통한 모습을 보였다.

6.25 전쟁 당시 군번없는 학도병들이 국운을 살리는 단초를 제공한 '장사상륙작전'의 전공이 기념공원 조성을 통해 잊혀진 전투가 재평가를 받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14일 새벽 4시30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앞바다 한 가운데 LST(상륙함) 한 척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닻을 내렸다.

이 배의 이름은 문산호. 전날 오후 2시께 대부분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722명의 유격대원을 싣고 부산항을 떠나 14시간여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들은 지난 8월24일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된 학도병들로 27일 창설된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에 소속돼 2주간 밀양에서 기초훈련과 유격훈련을 받은 뒤 출동명령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다.

문산호는 얼마 뒤 배의 뒷문을 내려 이들을 바다 한 가운데 내려놓았다. 작은 구명정을 나눠 탄 유격대원들은 거센 파도를 뚫고 같은 날 오후 2시50분께 장사리 해안 상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을 실어 나른 문산호는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좌초, 차가운 장사리 앞 바다에 수장됐다.

이에 유격부대는 곧바로 북한군의 주 보급로였던 포항·영천방면 7번 국도를 완전히 차단하고 후방활동을 마비시켜 북한군 정예부대를 영덕 방면으로 유인했다.

당시 이들이 도착한 영덕군을 포함해 낙동강 이북 지역 대부분은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상태였으며, 평양방송은 UN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도했다.

그 뒤 유격부대는 9월 16일~17일 이틀간 상륙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북한군 김무정 군단 예하 제5사단 정예부대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공격하며 북상해 격퇴했다.

이 전투로 아군도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일 오후 3시30분께 이들의 철수를 위해 장사리 앞 바다에 도착한 LST 조치원호에 미처 오르지 못한 39명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22일 당시 학도병으로 참가했던 채종만(81)씨는 "당시 태풍으로 인해 파도가 높아 접안이 힘든 상태였지만 문산호가 전속력으로 육지와 가까이 접안해 먼저 1중대가 상륙을 시도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난 3중대에 소속돼 상륙을 성공, 적들과 싸워 승리했지만 군번도 없이 전사한 전우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 배수용(88) 회장은 "1950년 8월24일 대구역에서772명의 유격대원을 모집했으며 이중 80%는 학생, 20%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육군본부직할 독립 제1 유격대대 (일명, 명부대)로 창설돼 인천상륙작전 교란을 위해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으며 772명의 부대원 중 현재 38명이 생존해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활약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장사상륙작전은 미국 군사전문가들조차 성공확률 5000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개시 직전 적 후방지역에서 교란작전을 수행,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며 서울을 수복하고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전공을 인정받아 육군본부는 1952년 12월 전사자들을 '우국청년(의사)'이라고 칭했으며, 맥아더 장군은 1960년 10월31일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원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친필서를 보내왔다.

이 작전은 전술적인 측면보다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작전이었다는 점과 상륙작전의 경험 획득 및 적 후방지역에서 유격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군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대한민국의 국운을 좌우하는 작전이었다면 장사상륙작전은 '대한민국 구국'에 결정적으로 일조한 작전이었다.

특히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나이 어린 학도들이 자원해 참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국민들의 애국심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보여준 역사적 사실로 평가되고 있다.

김병목 영덕군수는 "장사상륙작전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진 전투'가 아닌 '기억되는 전투'로 남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며 "스스로 참전한 학도병들의 충혼이 후세에 널리 기려지도록 역사의 그늘에서 나와 빛을 찾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