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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채점하던 선생님
게시물ID : humorstory_3458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림자악어
추천 : 1
조회수 : 3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23 00:23:13

 

벌써 10 년 전이다. 내가 갓 중학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중간고사를 처음 보았을 때다.

시험 끝나고 교무실 가는 길에, 담임선생님께 가기 위해 제1교무실을 지나가야 했다. 교무실 맞은편 책상에 앉아서 시험지를 채점해 점수를 매기는 선생님이 있었다. 온 김에 서술형 점수를 알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굉장히 귀찮아하시는 것 같았다.

 

"한번만 가르쳐 주실 수 없습니까?"

 

했더니,

 

"그 점수 하나 가지고 내가 제3교무실 까지 가야하겠소? 알고 싶거든 다른 데 가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선생님이었다. 부탁하지도 못하고 음료수를 하나 사서 바쳤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채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채점하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살펴보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가르쳐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수업종 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점수매기지 않아도 좋으니 거기까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받는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채점한다는 말이오? 선생님, 외고집이시구먼. 시간이 없다니까요."

 

선생님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물어보우. 난 안 가르쳐 주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수업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채점해 주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채점이란 제대로 매겨놓아야지, 점수를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채점하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시험지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모양이다.

 

3교시를 놓치고 혼이 나 버린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채점을 해 가지고 성적표가 기한 내에 될 턱이 없다. 학생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짜증만 되게 부른다. 학교도덕(學校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선생님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선생님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창문밖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남자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잘 나온 서술형 점수에 화증이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점수를 내놨더니 어머니는 시험을 잘 보았다고 야단이다. 지난 번에 본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설명을 들어 보니, 쓰기문제가 너무 딱딱하게 채점하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깍이고 심지어 띄어쓰기가 어쩡쩡해도 깍이는데, 자잘한 실수는 보아 주고 중요한 실수나 틀림은 다 잡았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점수는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선생님께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채점법은 사인펜의 색깔을 다달이 골라가며 채점을 하고 3번씩 다중채점을 해 딱 알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요새 채점자들은 귀찮다고 사람을 시켜 양산을 하지 않나, 학생을 시켜 큰일이 나기도 한다.

 

예전에는 최종 성적표를 낼 때, 학생들에게 궁금증을 물어보고 고찰 시간을 충분히 준다. 그리고 방송을 내서 아이들에게 충분히 알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성적표를 발행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우체국을 써서 그냥 보낸다. 금방 도착한다. 그러나 확실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아이들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바꾸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옛날 사람들은 채점은 채점이요 점수는 점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사람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우등생을 만들어 냈다.

 

이 시험점수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교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교육자가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선생님을 찾아가서 카네이션에 박카스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월요일에 등교하는 길로 그 선생님을 찾았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앉았던 자리에 선생님은 있지 아니하셨다. 나는 그 선생님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창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선생님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채점을 하다가 유연히 추녀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선생님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기말고사 성적표 봉투를 뜯고 있었다. 전에 90점, 80점을 자랑하던 생각이 난다. 고득점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서술형 만점 맞을 수가 없다. 서술형 만점이니 단답형 만점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자랑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5년 전 서술형 채점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방망이 깍는 노인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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