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검색을 해보다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네요.
미대사관 사이트에 있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1989년도 미국정부의 공식입장 발표문입니다.
http://seoul.usembassy.gov/p_kwangju.html 영어
http://korean.seoul.usembassy.gov/p_kwangju.html 한국어 번역본
너무 길어서 다는 못올리고 일부분들만 올립니다. 전문은 위 링크에 있습니다
"15. 미국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한 민주주의를 증진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한국 국내정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정치 변화는 미국이 어떤 조치를 원하는가에 상관없이 결국 체제 자체가 상충하는 알력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
"26. 위컴 장군은 5월 13일 全斗煥장군과 만났다. 全장군은 앞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말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이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하고 있다며 남침을 감행할 결정적인 시기가 임박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위컴 장군은 미국은 언제나처럼 한국을 방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찾을 수 없다고 답했다. 위컴 장군은 정치자유화가 한국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며, 안정이야말로 북한의 남침을 억지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미국측 견해를 피력했다. 위컴 장군은 全씨가 국내정세에 대해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북의 도발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29. 학생시위가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기는 했으나 경찰은 군부대 없이도 이를 통제할 수 있었다 미국 관측통들은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양측 모두 폭력을 상당히 자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주한 미국대사관 관리들은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 군이 배치되었다는 점에 대해 우려했다. "
"32. 5월 17일 토요일에도 하루종일 시위가 없는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강경 한 자세를 우려한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侊洙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정 부에 대해 군부가 강경책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촉구하였으며, 특히 金大中씨 체포와 같은 정 치인들에 대한 탄압은 '반발을 불러일으킨다'고 경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侊洙 비서실장으로 부터 비상계엄 전국확대실시 결정이 임박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41. 미국관리들은 5월 18일 일요일 오전, 비상계엄 확대에 항의하고, 그 범위와 의미, 특히 金大中 씨, 金泳三씨, 金鍾必씨 및 기타 정치 지도자들의 체포 사실을 확인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 다. 미국 관측통들은 무장한 계엄군이 대학을 점령하고 서울 전역의 주요 시설들을 경비하고 있다 고 보고했으나 그들 역시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42. 주한 미국대사관 관리들은 광주의 상황이 서울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5월 19일 월요 일 오전에 데이비드 밀러 광주 미국문화원장이 대사관에 전화를 해왔을 때에 비로소 미국은 광주 에서 일어난 폭력사태에 대해 단편이나마 처음으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밀러 원장은 광주시 민들로부터 시내에서 심각한 폭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특전사 부대가 몇 명의 사망자를 비롯한 많 은 부상자 발생에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서울에 있던 한 미군 관리도 5월 19일 광주에 있는 친지로부터 그와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44. 계엄 아래에서 엄격한 검열을 받던 한국 언론들은 5월 18일 일요일과 5월 19일 월요일 광주에 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았다. 5월 19일과 5월 20일 사이의 광주의 사태 전개 에 관한 미국대사관의 단편적인 지식은 데이비드 밀러 광주 미국문화원장으로부터 얻은 약간의 정 보와 광주시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美공군기지의 관리가 보낸 제한적인 관찰보고, 그리고 차츰 외국언론의 보도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안전상의 이유로 외부로 나 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밀러 원장의 정보는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한국의 소식통들은 광주에 특별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했다."
"47. 미국은 특전사 부대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고, 부대가 광주로 이동한 것에 대해서도 사전 에 알지 못하고 있었다. 특전사 부대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마침내 미국이 광 주에서 일어난 상황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 부대의 과잉진압이 비극의 직접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54. 5월 22일 美국무장관 주재하에 한국에 관한 고위 정책 검토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광주문 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한국정책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66. 미국은 (정치면에서는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이미 몇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북한의 군사 위협 을 감안하여 한미 안보관계를 깨뜨리겠다는 위협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결정 자들은 한국의 독재와 불안정이 결국 한미 안보관계에 대한 미국 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5월 31일의 TV 인터뷰에서 카터 대통령은 미국의 한국정책의 기저를 이루는 두 가지 원칙인 안보와 인권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하였다. 카터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은 확고부동하다고 확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가 "좌절되었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완전한 민주정부를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 한다"고 말했다."
"70. 전세계가 미국이 全씨에 대해 거리를 두고 그의 정권장악에 불쾌함을 표하는 정책을 택한 것 을 알고 있을 때 유독 한국 국민들만 이를 모르고 있었다. 全斗煥 정권은 비상계엄 전국확대하에 장악한 언론을 이용하여 미국이 그들을 비난하기는 커녕 지지하는 것처럼 묘사해가며 미국의 입장 을 왜곡했다. 미국이 특전사부대가 광주에서 한 행동을 지지한다는 왜곡된 라디오 방송이나, 협상 을 통해 광주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미국 입장을 적은 전단을 공중 살포하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 긴 당국의 처사 등 그들의 기만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5월 23일 한국 언론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한 말을 왜곡하여 마치 그가 5월 17일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거나 '승인'한 것처럼 보도했다."
"72. 계엄령 아래서 한국언론은 한국의 사태 전개에 대한 미국관리들의 말을 번번이 무시하고 왜곡 하였다. 미국관리가 한미 안보관계를 지지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반드시 대서특필되었으나, 민주 화와 인권존중을 촉구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거나 아예 보도되지도 않았다. 6월 22일 미국 대사관은 미국관리들이 한국문제에 대해 한 발언을 자체적으로 모아 발표하고 이를 한국내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우송하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6월 25일 마이클 아마코스트 부차관보는 한국의 사실 왜곡활동에 맞대응하고 미국의 정책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美하원 외무위원회 소위원회에 나와서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미국의 한국정책을 논했다. 6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광주관련 역할에 관한 잘못된 사실이 방송되고 있는데 대하여 全씨에게 직접 항의 했다."
"G.5 1980년 이래 한국에서 반미감정과 반미운동이 점차로 고조되어왔다. 귀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0 80년대에 반미감정이 고조된 한가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광주 비극에 미국이 직접 관련 했거나,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그룻된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룻된 인식은 어느 정도는 그 당시 한국당국자들의 기만에 의해, 또 제5공화국 기간중 줄곧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 일을 제한함으로써 조장 되기도했다. "